'classical'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10.05.26 요즘 듣는 음악들 - May 2010 (4)
  2. 2010.04.29 음악 평론에 관한 단상 (v.1.2) (4)
  3. 2010.04.14 MTT와 SF Symphony의 말러 2번 공연 - SF Chronicle (3/14/10) (9)
  4. 2010.04.14 정명훈의 샌프란시스코 Ravel 공연 - SF Classical Voice (3/7/10)
  5. 2010.04.12 [김마에의 음악 가이드] 실내악, 현대음악, 비올라... (11)
  6. 2009.03.27 [music]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명연주? (3)
  7. 2009.01.22 [music]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 - by Furtwangler & Berlin Phil. (1943) (4)
  8. 2008.06.04 [music] Bach, "Liebster Jesu, wir sind hier" BWV 731- by Albert Schweitzer (1936)
  9. 2008.05.22 "Heavenly" 교향곡과 함께 여는 아침 (3)
  10. 2008.05.06 [이코스타 기고] 바하의 “마태수난곡”과 더불어 묵상하는 예수님의 고난 (4/2004)
  11. 2008.05.06 초심자를 위한 클래식 음반 24선 (1)
  12. 2008.05.06 클래식 음악 평론가를 꿈꾸다
2010.05.26 21:22

요즘 듣는 음악들 - May 2010

1. 베토벤 - 9 교향곡 (벤스케, 무티) 
~ 클래식 음악을 듣는한 앞으로도 베토벤 교향곡은 어느 버전이든 최소한 한 가지는 늘 곁에 끼고 살게되지 않을까 싶다. 요즘엔 '구' 버전 가운데선 무티, '신' 버전 가운데선 벤스케 연주에 제일 손이 자주 간다. 무티의 연주는 중고 가게에서 아무 기대없이 한 장에 1불 주고 샀는데, 그 뜨겁고 단단한 연주 퀄리티에 깜짝 놀랐다. 벤스케 전집은 이 곡을 전혀 다른 곡처럼 신선하게 듣게 해주는 맛이 있어 좋다. 정격연주 식의 깔끔함을 살리면서도 대편성의 다이내믹함과 아다지오의 풍성함을 하나도 잃지 않았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볼륨 키워놓고 들으면 타악기 - 특히 팀파니 - 소리도 정말 일품이다.  

2. 말러 - 9+ 교향곡 (아바도)
~ 기념 연도가 2년이나 지속되는 금년과 내년엔(탄생 150주년 & 사망 100주년) 어차피 여기저기에서 말러 이야기를 계속 듣게될 것임이 자명하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 흐름에 적극적으로 발맞추어 그의 음악 전체를 한번 조명해보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것 같다. 나의 경우에 말러의 음악에 본격적으로 입문하도록 귀를 열어준 연주는 아바도의 1번이었다. 아바도의 묘미는 뭐랄까? 번스타인 식의 '오버' 없이도 충분히 말러의 '드라마'를 구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그렇게 미묘하게 템포를 변화시키면서도 전체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유려하게 이끌고가는 점과 디테일에 강한 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않나 싶다. 연로하신 아바도 선생이 살아계시는 동안 그가 말러 지휘하는 모습을 한 번쯤 볼 수는 있을런지...  

3. 하이든 - 피아노 3중주 (하이든 트리오 아이젠슈타트)
나이가 든 것일까? 요즘 스스로에게서 발견하는 경향 가운데 하나는, 옛 거장들이 말년에 남긴 소위 중후장대심오한 연주들보다 현대 젊은 연주자들의 정갈하고 때로 소박한 연주들에 훨씬 마음이 끌리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곡을 처음 접할 때 어떤 연주로 시작하느냐가 나름 입맛을 결정하는 데에 끼치는 영향이 있는 것 같은데, 요즘 실내악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고 있는 만큼 젊은 연주를 선호하는 경향을 실내악 쪽에서 더 두드러지게 느끼는 것 같다. 쉬운 실내악부터 도전해보라는 SK의 조언에 따라서 하이든 트리오 전집을 찾던 중 사실은 '싼 맛에' 이 젊은 연주자들의 전집 세트를 구입하게 되었는데, 들을수록 "이 이상 더 무엇을 바라리오?"하는 느낌을 받게된다. 그 유명하다는 보자르 트리오나 안드라스 쉬프 연주로도 몇 곡 들어보았지만 굳이 여기서 더 나은 버전을 찾아 헤멜 필요가 없다는 느낌이다. 이런건 콜렉터에게 그리 자주 찾아오는 일이 아닌데... 

4. 베토벤 - 중기 현악4중주 (에머슨, 타카슈 사중주단)
모든 후세 작곡자들의 영감이자 영원한 현대음악이라는 베토벤의 사중주인 만큼, 실내악을 배우려면 이 부분을 익혀나가는 진도도 게을리해선 안된다는 뭔가 책임감(?)같은 것을 느낀다. 베토벤의 경우, SK는 중기부터 시작해보라고 하고, DK는 초기-후기-중기의 순서로 들어보라시니, 일단은 먼저 컨설팅한 'SK 접근법'을 따라보고 그 후론 'DK 감상법'으로도 들어보고자 한다. 중기 곡들 가운데선 라주모프스키 3번, 그 가운데서도 마지막 악장에 귀가 번쩍 띄인다. 특히 에머슨의 연주로 들으면 이건 거의 하드락의 경지라고 해야할 듯 하다. 에머슨 연주는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해석에만 익숙해지면 왠지 decadant한 초콜렛 아이스크림을 즐기는 듯한 죄책감(?)이 들 것 같기도 해서 '우리 시대의 모범'이라고들 하는 타카슈와 함께 듣고있다.

5. 닐센 - 교향곡 2,4번 (2번-굴드, 4번-마르티농, 전곡-쿠차)
~ 김마에 가라사대 "닐센은 저평가 우량주"라는데 어쩌겠는가, 열심히 들어봐야지.. 우선은 추천곡인 2번을 시작으로 들어보니 약간은 영화음악스럽기도 하고 상당히 괜찮게 들린다. 북구판 '발라드의 황제'인 그리그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는 게스도 들고.. 사실 최근들어 그리그, 시벨리우스는 물론, Gade, Atterberg, Stenhammer, 그리고 최근의 Rautavaara에 이르기까지 '북구' 아저씨들과 조우하는 인연이 왠지 잦은 편이다. 고전-낭만 계열에서야 독일-오스트리아 쪽이 워낙 꽉잡고 있었지만, 국가/민족별로 다변화하는 19-20세기 음악의 경우엔 이렇게 지역별로 들어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는 접근 방법인 것 같다.       

6. 스트라빈스키 - 신고전주의 시대 작품들 (Craft) 
~ 음열주의 작곡가들 작품에 기가죽은 후 '현대음악가는 다 무서운 사람들'이란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때에는 스트라빈스키도 막연히 같은 족속일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아저씨 알고볼수록 참 재미난 분이다. 다재다능하다 해야할지, 약삭빠르다 해야할지.. 어떤 때는 전위적인 사람 같아보이다가도, 다른 때 보면 바로크로 낭만파로 변신하면서 모든 색을 다 보여주는 카멜레온 같아보이기 때문이다. 현대음악의 가능성을 다 실험해봤다는 말에 수긍이 가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다양성과 적응성을 중시하는 미국문화 코드에 딱 맞았기에 그러한 성공을 누린 것은 아니었는지 하는 궁금함이 들기도 한다..    

7. 존 콜트레인 - 1959년 앨범들
~ 1956년 앨범들에서부터 순차적으로 들어온 '콜트레인 전곡 듣기'의 진도가 재즈 역사에서 특별히 의미심장한 한 해였던 1959년에 다다르게 되었다. 아는 사람이라면 애틀랜틱 시대의 최고작 "Giant Steps"와 마일스 데이비스의 유명한 "Kind of Blue"를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재즈 역사상 열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최고의 명반들이자 베스트셀러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보다 더 호기심과 놀라움이 가는 대목은, 겨우 몇 달 간격으로 어떻게 '극한 하드밥'(Giant Steps; 매 한두 음마다 조 바꿈)과 '모드음악'(Kind of Blue; 열 마디 스무 마디 가도 조 절대 안바꿈) 사이를 왔다갔다할 수 있었는지 하는 대목이다. 그는 남보다 늦은 30세에 녹음을 시작해서 남보다 이른 40세에 사망할 때까지 10 년 동안 매 2-3 년을 주기로 스타일이 확확 달라지곤 했다. 연주 인생 자체가 실험의 연속이었던 셈이다. 각 연도별로 스타일은 매우 달랐지만, 자기철저함을 지닌 장인정신의 소유자였던 만큼 각 스타일 안에서 추구한 완성도의 레벨만은 매우 일관적이었다고 생각된다. 

 
cf. 다음 예약곡들 (언제가 될런진 모르겠지만) - 드보르작 사중주집, 슈베르트-슈만-브람스 라인의 실내악곡들, Art of Fugue 다양한 악기로 듣기, 빌 에반스 트리오(59-61년) 


6/13 업데이트)
1. 서로 비슷한 에머슨-타카슈 비교보다는 대비가 더 뚜렷한 이탈리아노 또는 베그 등 전세대의 명연주들과 비교하면 어떻겠느냐는 추천이 있었음.  
2. 닐센은 덴마크 출신이므로 좁은 의미에서 '스칸디나비아'라고 볼 수 없다는 지인의 지적에 따라 '북구'로 수정함.
3. 비록 스트라빈스키의 스타일이 굉장히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스타일을 뛰어넘는 관현악법과 특히 리듬이라는 '시그니처'가 있음에 눈떠보라는 지적이 있었음. (시간을 두고 계속적으로 들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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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9 17:18

음악 평론에 관한 단상 (v.1.2)

음악을 사랑하는 한 애호가로서, 듣고싶은 음반을 다 구입할 수 없는 한 구매자로서, 그리고 음악이 주는 행복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픈 소박한 바램을 가진 한 이웃으로서, 이래저래 평론가들이 이야기하는 곡/연주 해설에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평론가도 천차만별이라서, 자기의 비평에 대한 나름대로의 근거를 디테일하게 대는 '실질적인' 사람에서부터, 신중하고 공정한 입장을 견지하느라 좋다는건지 나쁘다는건지 조차 알기 어려운 '모호한' 사람과, 자기 주장은 매우 강한데 왜 그런지에 대한 근거는 밝히지 않는 '권위적인' 사람에 이르기까지 천양각색의 스타일들을 만나게 된다. 

최근 한 연주회에서 감상한 말러 교향곡 2번을 다시 한번 제대로 비교 청취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것저것 음반평을 참고하다가 흥미로운 경우를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한 연주에 대한 두 곳의 평가가 다를 뿐 아니라 평론의 스타일 자체도 정반대인 경우였다. 둘 다 간편한 인터넷 서취가 가능해서 많이 알려진 웹진들이며(allmusic.com, classicstoday.com) 대상 음반은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한 루체른 페스티발 실황연주 말러 2번이었다. 

먼저, 전자의 경우 이 음반에 만점을 주었다. http://allmusic.com/cg/amg.dll?p=amg&sql=43:121660  그리고, 평론이라기 보다는 거의 찬양에 가까운 찬사를 보냈다.

"You have to listen to this disc. It justifies the whole invention of recording sound"
"... performances here are more than magnificent: they are truly and profoundly transcendent"
"One of the greatest recordings ever made in the history of sound recording"


이 연주를 못들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흥미를 느낄만한 이야기들이긴 한데, 구체적으로 어떤 점들이 그렇게까지 - 레코딩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준으로 - 좋았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다. 백그라운드 정보와 전체적인 소감만을 최상급의 표현으로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구체적인 사항은 알 필요없이 일단 사서 들어보라는 것인지...

아뭏든 위의 글을 쓴 평론가는 아바도의 다른 말러 음반들에 대해서도 대부분 최상의 평가를 내리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가와 그(들)의 연주에 감사하고 좋아하는 일이야 나무랄 수 없는 것이겠지만, 문제는, 제대로 한번 들어보지 않고서도 어쩌면 쓸 수 있을 정도의 이야기를 하는 수준에 평론이 머무르고 말았다는 점일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같은 연주에 대한 후자의 입장은 상당한 혹평이라고 볼 수 있다.  
http://classicstoday.com/review.asp?ReviewNum=8360 

"... there's the question of what business Claudio Abbado had in approving the release of his third recording of Mahler's Second Symphony..."
"Interpretively there's nothing new here. Abbado's still far too placid in the scherzo, which flows along as if anesthetized, with unremarkable wind solos"

그러면서 여기저기 구체적인 예를 들고 있는데, 왜 그렇게 느꼈는지 알 수 있는 '근거'는 제시되고 있지만 전체를 판단하는 기준치고는 다소 지엽적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몇몇 디테일을 바탕으로 전체를 평가한 '혹평'인 셈인데, 앞의 경우처럼 디테일 없이 전체적인 소감만 제시한 '호평'과는 정반대의 입장 및 스타일을 가진 예라고 볼 수 있다.
 
이 평론가의 경우, 곡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기준을 나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독자들의 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지만, 문제는 조금 다른 곳, 즉 평론가로서 가지고있는 그의 자세에서 엿보이는 듯하다. 아바도가 지휘한 말러 3번의 경우을 예로 들어보자. http://classicstoday.com/review.asp?ReviewNum=5302 

"It's performance characteristics such as these that lead me to conclude that Abbado doesn't have a real sense of how this symphony should sound... This is music that should startle and stun; instead Abbado makes it sound boring."

그러면서 이 연주를 번스타인의 같은 곡 연주와 비교하였다. 

"considering that... DG in the meantime recorded a magnificent version of this symphony with Leonard Bernstein and the New York Philharmonic (who beat the Berliners like Lennox Lewis beat Mike Tyson), you have to wonder if there was a real need for a new Abbado Mahler Third."
"Bernstein's is bold, brazen, and sharply articulated, while Abbado's rounded sonorities sound more like a gentle reminder than an urgent summons."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번스타인의 연주가 있는데 왜 아바도의 연주가 필요하냐고?

한 가지의 해석 스타일로 모든 이의 동의를 얻어내기 어렵다는 점에서는 대개의 작품들이 마찬가지이지만, 이런 성향은 말러의 음악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다. 그의 음악이 갖는 복잡성과 규모 때문일 것이다. 번스타인이나 텐슈테트와 같은 다이내믹하고 중후장대하며 감정기복이 심한 스타일은 그 자체로 하나의 규범이지만, 길렌 또는 아바도처럼 투명하고 담백하며 디테일에 강한 어프로취 역시 오늘날엔 많은 지지자를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거의 정반대의 스펙트럼에 놓여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 이런 스타일들이 두루 인정되며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이 어쩌면 말러 음악의 묘미인지도 모른다. 

위의 평론가가 아마도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모를리는 없었을텐데... 그렇다면 왜 이런 비교를 공정한 비교인양 제시한 것일까? 이 사람은 아마도 연주의 완성도를 논하는 것과 자신이 선호하는 스타일에 부합하게 연주하는 것을 잠시 혼동하고 있었던 것일까? 

다니엘 하딩이 챔버 규모로 연주한 말러 4번 평론을 예로 들면, 소위 '평론가의 오만함'이 어디까지 나갈 수 있는지를 보게된다. http://classicstoday.com/review.asp?ReviewNum=8524

"I fell asleep twice trying to get through this sterile, benumbed performance of Mahler's Fourth Symphony, and the bottom line is that the Mahler Chamber Orchestra (at least under Daniel Harding) has no business playing it."

음악을 듣는 도중에 본인이 두 번씩이나 졸았단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본인을 졸게 만든 연주를 한 악단이므로 연주금지 또는 해산의 조치라도 취해야한다고 주장할 권리가 정말 자기에게 있다고 그는 믿은 것일까? 

이 정도의 태도라면, 음악적 진실 여부를 떠나서, 한 사람의 상식인으로서 상무식하단 소릴 들어도 할 말이 없다. 나 또한 하딩의 연주를 그리 비범한 연주로 기억하진 않는 편이지만, 그것은 그가 시도한 해석 안에서의 설득력과 완성도에 동의하지 않은 때문이었지, 그가 시도한 소규모 챔버 스타일의 해석 자체가 잘못인 때문은 아니었다. 자신이 선호하는 스타일을 가지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자신의 스타일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으로 치부하는 행위는 정당성을 얻을 수 없다. 적어도 누군가 다른 사람들의 노력의 산물인 작품/연주를 가지고서 '공적 평론'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공정성의 이슈에 대해 윤리적 책임을 가져야 한다.

이 평론가는 최근엔 다소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유로(즉, 현악군이 비브라토를 쓰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노링턴의 말러 시리즈에 대해서도 사망선고에 준하는 악평을 내린다. http://classicstoday.com/review.asp?ReviewNum=11071  

"I still hope, if only for the sake of the talented Stuttgart players, that someday they will summon up sufficient nerve to tell the management that either this tiresome quack has to go or they will... Don't they realize how foolish Norrington is making them look?"

그러나 실제로 역사를 돌이켜보면, 정말 "foolish"한 모습으로 남은 사람은 여러가지 실험을 한 음악가들이 아니라 진정성으로 말미암아 초월성을 획득했던 이들의 면모를 알아채지 못한 당대의 평론가 자신들 가운데 더 많았다. 즉, 바하의 수난곡을, 베토벤의 대푸가를, 말러의 첫 교향곡을 이해할 수 없었던 '전문가들' 자신의 자신만만한 혹평의 말들이 먼 훗날 그들을 판단하였다. 음악가는 제 1선에 선 창조자들이요, 평론가를 포함한 감상자는 제 2선에서 그들의 창조의 결과를 누리는, 이를테면, 소비자들이다. 그렇다면, '누리는 자들'은 기본적으로는 '누리도록 돕는 자들'에 대한 감사와 겸손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건설적인 비평의식이 자라나고 이해의 깊이가 더해지는 중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음악가들이 잘한 것을 감상자들이 알아보고 기꺼이 박수를 보내며 부족한 부분은 보다 발전적인 방향으로 향해가도록 건설적인 비평을 제공하는 기반환경 마련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음악예술 발전의 토양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음악가들을 길러내는 데에 대부분 집중되어 있는 사회적 자원과 에너지가 감상자들을 교육하는 데에도 좀 더 분배될 수 있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누구나 평론가가 되어야할 필요는 없지만, 누구나 평론의 결과를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평론은 때로 공동체성을 획득하기도 하고 양날의 검이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건전한 평론의 중요성은 더해지는데, 이는 음악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음악을 향한 애정어린 열정 위에 상호 존중의 자세가 더해질 때에 달성될 수 있다고 믿는다. 



ps. classicstoday.com의 David Hurwitz의 글에는 사실 부정적인 평보다는 supportive한 평론이 더 많은 편이다. 특히, 나로서는 듣도보도 못한 현대음악 작품/연주를 소개하고 지지하는 데 보여주는 그의 해박한 이해와 열정은 감탄과 도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비판적인 글 가운데서도 많은 경우는 구체적인 지적을 통해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서 볼 수 없는 시원시원한 느낌을 들게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만큼 위와 같은 경우는 오히려 소수임을 밝혀두는 것이 공정한 처사일 것이다. 이분이 보다 존중어린 자세를 가지기를 바라는 것 만큼이나 나 자신 또한 그와 같은 평론가들이 기여한 '창조물'들에 대해 동일한 존중과 감사의 마음을 유지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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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4 20:05

MTT와 SF Symphony의 말러 2번 공연 - SF Chronicle (3/14/10)

말러의 2번 교향곡은 아마도 말러의 교향곡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인기를 누리는 곡의 하나일 것이다. "부활"이란 부제가 붙었지만 그리스도적 의미에서의 부활이라기 보다는 지금 주어진 삶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살아 승리하라는 의미에 가까운 메세지를 담고 있다. (e.g. 4악장에서 이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에 대한 5악장 도입부의 강력한 "No!")  음악적으로는 다양한 주제들이 인간의 희로애락의 여러 면면들을 그리다가는 다시 기본 주제로 돌아오곤 하는 소나타 형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인생의 실존적 질문에 대한 질문을 제시하고 그 답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전체 악장이 진행되는 구조를 파악하는 데에 하나의 감상 포인트가 있다고 생각된다. 

틸슨 토마스가 이끄는 샌프란시스코 심포니가 녹음한 말러 2번은 몇 년 전에 아쉽게 작고한 Lorraine Hunt Lieberson이 참여한 음반으로 개인적으로도 즐겨듣는 연주의 하나인데, 이번 연주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의 하나가 메조 소프라노 Katarina Karneus가 노래하는 부분들이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던 만큼, 급히 프로그램을 다시 보면서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가 하고 찾아보게 만들 정도로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다. 앞으로의 활동이 기대가 된다. 

이날 연주는 꽤 호연이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3-5악장으로 이어지는 부분들이 좋았던 것 같다. 3악장은 충분히 유머러스했고, 4악장 'Urlicht'는 독창자의 노래를 듣느라 관현악 반주가 어땠는지 거의 기억이 안나는 정도였으며, 5악장에선 지휘자의 구성력이 돋보였던 것 같다. 1악장의 저음 주제와 2악장의 피치카토 부분도 훌륭했다. 아쉬운 것은, 1악장과 5악장에서 군데군데 - 아래 평론가의 지적처럼 - 흐트러지는 느낌이 있었던 점, 2악장의 템포를 너무 느리게 잡아서 전체 구조가 깨지는 듯한 다소 불안한 느낌이 있었던 점, 그리고 지난주 프랑스 국립 라디오 오케스트라에 비해 현저히 딸리는 듯한 금관악기군이 다소 안습이었던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타악기군은 좋았다. 

전반적으로, 곡에 몰입해서 감상하기에 충분히 좋은 연주였다고 생각된다. 가까운 곳에 누군가 열심히 '음악 만들기'에 애써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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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cal writing is a relatively small component of Mahler's Second Symphony, occupying only the last two movements of the work's broad five-movement span. But it loomed large and inviting in Davies Symphony Hall on Thursday night, during an intermittently potent and sometimes frustrating performance by Michael Tilson Thomas and the San Francisco Symphony.

It was during the vocal passages - primarily the superb contributions of the Symphony Chorus under director Ragnar Bohlin, but also the solo turns by mezzo-soprano Katarina Karnéus and soprano Laura Claycomb - that the evening came most fully and uncompromisingly to life.

If Mahler meant to echo the formal trajectory of Beethoven's Ninth Symphony by driving toward a towering vocal climax, in which the power of a text heightened the mute eloquence of instrumental music, this was a performance to make good on that scheme.

Karnéus, a Swedish artist whose guest appearances with the Symphony have been reliable delights, outdid herself with a stylish and probing performance. Her singing in the fourth movement, "Urlicht," was at once dark-hued and buoyant, imbuing the music with an oracular impact that never sounded heavy-handed.

Claycomb made a suave contribution to the finale, and the chorus moved with assurance between passages of close-knit intimacy - particularly in the hushed expression of wonderment that introduces the symphony's choral segment - and the thunderous explosions that dot the movement.

Even the orchestra was inspired to accomplish great things, from the lovely, fine-tuned brass introduction to "Urlicht" to the roof-rattling final pages of the symphony.

But the hour or so leading up to the final movements found both Thomas and the orchestra sometimes struggling to maintain a clear sense of direction amid Mahler's far-reaching excursions.

It's been six years since the orchestra last played this piece - in a brilliant performance caught live for the Symphony's complete Mahler recording cycle - and Thursday's concert showed signs of some blurring of focus in the interim.

The principal points of articulation were firmly in place, sometimes gloriously so - the fierce outbursts that mark the formal junctures in the first movement, or the quick, sardonic tread of the third-movement scherzo. 

- by Joshua Kosman, Chronicle music cri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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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4 20:01

정명훈의 샌프란시스코 Ravel 공연 - SF Classical Voice (3/7/10)

모처럼 기억에 남을만한 훌륭한 공연을 감상했다. 그 정도의 연주를 만들어낸 사람이 같은 한국인 정명훈씨였기에 더욱 자랑스럽고 감사하기도 했다. 이날 특히 비범했던 관악기와 타악기군을 보면서 '우리 동네 오케스트라도 이렇게 잘할 수 있구나'하고 잠깐이나마 뿌듯한 느낌을 가졌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지휘자를 따라 프랑스에서 온 국립 라디오 오케스트라였음을 알게되어 다소나마 허탈하기도 했다. 다 좋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Daphnis, 그리고 그 중에서도 마지막 general dance에서 고조되어 완결짓는 그 귀를 잡아끄는 음악의 이미지의 여운이 지금도 쉽게 사라지질 않는다.  '음악의 '텍스츄어'란 이런 것을 뜻하는 거였구나' 하는 진가를 알게해준 음악인들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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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vishing Ravel"

Last week was a big week for Maurice Ravel’s music at Davies Symphony Hall. Hard on the heels of the four San Francisco Symphony subscription concerts that included Ravel’s Valses nobles et sentimentales, Sunday evening saw a large, all-Ravel program by the visiting Orchestre Philharmonique de Radio France under its conductor, Myung-Whun Chung. Yet in a way, the most memorable part of all this was Sunday’s glorious vocalism by mezzo-soprano Anne Sofie von Otter.

Chung began with the complete Ma Mère l’oye (Mother Goose) ballet score, which was followed by von Otter’s sensational performance of the composer’s Shéhérazade cycle. Following intermission, there were the first and second Daphnis et Chloé Suites. Plus La Valse! The concert was so overpoweringly plush that I wondered if I had been putting on weight via my ears. And to my surprise, Chung conducted all of this long program almost entirely from memory, and with consistent artistry of the highest kind.

Shéhérazade, Ravel’s most erotic work, consists of three songs: the large “Asie” (Asia) with full orchestra, followed by two more intimate creations using smaller forces, “La Flûte enchantée” (The enchanted flute) and “L’Indifférent” (The indifferent one). In the first, the singer dreams of traveling to Asia, underlined by undulating sea music, followed by a kind of sonic travelogue.

Initially, there’s “ ... Damascus and the cities of Persia” where “Vizirs, who, with the crook of a finger, dispense life or death as the spirit moves them.” That’s followed by an absolutely magical moment in the history of orchestral music as the singer intones, “... and then — China.” Whereupon the large orchestra swoons into an orgy of glorious sounds, before the words, “I desire to see roses and blood, I’d like to see men dying of love or else of hate.” (Tristan Klingsor’s art deco poetry will tolerate no restraint of taste.)

“The Enchanted Flute” depicts a maiden at night, awake as her master sleeps, listening to a sensuous flutist out in the night. Whereas “The Indifferent One” covers a woman in her doorway, as a pretty young man passes, and she offers him a glass of wine, calling out, “Enter, and let my wine refresh you. But no, you pass on.”

These songs obviously require a wide variety of emotional timbres, volume levels, and sonic coloration. Most of the singing must be barely above a whisper, and yet there are spots in “Asie” where the singer had to raise her volume to near-Wagnerian levels to overcome Ravel’s fierce orchestral tuttis.

Von Otter, attired in an Asian-style dress of teal-blue sheen trimmed in gold cloth, met the full measure of the composer’s demands. Her control over extreme dynamics, her flawless intonation, her rhythmic accuracy — all seemed so effortless as to be uncanny. She made everything sound as natural and as easy as projecting a chorale in whole notes. Here we heard vocal artistry at its finest.

Mother Goose began life as a set of five easy pieces for piano four hands for children, and then, like Topsy, it just grew and grew. Ravel orchestrated the Suite for a modest-size orchestra in 1911, after which it became an international hit. He then added another orchestral movement and several interludes to form his half-hour ballet score.

The music is, like its composer, filled with childish innocence and charm, and on the podium Chung caught that aroma to a fare-thee-well. Similarly, the moods for the two virtuoso Daphnis and Chloe Suites for very large orchestra were well-judged and to the point throughout, by turns delicate, sensuous, or blazingly bravura. The finale of Daphnis No. 2 felt like running into a brick wall at full speed in an 18-wheeler.

Therein lay the one major problem of the program: It’s impossible to top, or even match, such sonic splendor. La Valse was well-played, yet it failed to make the sort of impression it usually does, standing as it did in the shadow of Daphnis No. 2.

As for the Radio France orchestra, it was fine indeed, highlighted by a superb woodwind section and uncommonly artistic percussionists. The timpanist was amazing in his sensibility to timbre, constantly switching sticks within a given composition to get a match for the section he was supporting at the moment. The brass were acceptable, if a tad messy in articulation; the strings quite able though a little lacking in depth of resonance, especially from the violins.

Still and all, it amounted to a most successful event that brought the audience to its feet more than once. After so arduous an evening for the musicians, no encore was played.

Heuwell Tircuit is a composer, performer, and writer who was chief writer for Gramophone Japan and for 21 years a music reviewer for the San Francisco Chronicle. He wrote previously for Chicago American and the Asahi Evening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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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2 21:06

[김마에의 음악 가이드] 실내악, 현대음악, 비올라...

[1. 실내악과 친해지려면?]

사람 숨소리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잘 하는 실내악 들어보면요,
정말.... 기가 막히거든요.
Mozart violin sonata같은 것도 좋고, Mendessohn Octet 같은 곡은,
이게 실내악 곡인지 바이올린 독주곡인지 잘 구분이 안되지만,
불꽃튀는 연주자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장이 바로 소편성이지요.

이런 실험도 재미 있으실 것 같은데요. 예를 들자면, Beethoven String Quartet전곡을
한꺼번에 들으면 좀 그러니까.. ^^
일단 Op. 18의 여섯곡 먼저 쭉 들어보세요.
저는 그중 6번이 제일 좋은데요.
제가 유학 와서 친구들이 연주하는 걸 가까이서 들었는데....
정말 말그대로 불꽃이 튀는 연주였거든요. 정말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그 친구들 중 첼리스트가 크로노스에 들어갔지요.  하여간...
그 이후에 Op. 59 전체와 Harp, Serioso를 건너 뛰고 후기를 들어보시면
Beethoven의 일생과 더불어 작풍의 scope가 대충 들어오실겁니다.
그 다음에 중기를 들어보시면 재미있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


[2. 현대음악에 입문하기에 좋은 곡?] 

현대음악 입문곡이라...
사실 Shostakovich나 Bax나 이런 사람들은 현대음악으로
치지는 않고요.. 보통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을 보통 현대음악이라고 하는 거 같아요.
그러고보니 저도 정확히 어떤 기준으로 나누는지를 모르겠네요. ^^

이게 입문곡까지는 아닐지 모르겠는데요. 최근 100년 사이의 곡들 가운데
그나마 듣기 쉽고 귀에도 잘 들어오는 곡을 추천해보라시면....

- Korngold / Violin Concerto (제일 좋아하는 곡 중 하나죠)
- Christopher Rouse / Flute Concerto (딱 한 군데 때문에 이 곡을 연주합니다ㅎㅎ)
- Bernstein / Serenade for Solo Voilin, Strings, Harp and Percussion (다른 곡들은 좀 아실 거 같아서..)
- Lutoslawski / Concerto for Orchestra (그나마 자주 연주되는 곡)
- Schnittke / Concerto for Piano and Strings (이 곡은 실연을 보실 기회가 있다면 추천합니다)
- Prokofiev / Symphony No.5 (일곱개(인가?) 중에 제일 자주 연주되는 곡이라 할 수 있죠)
- Bloch / Schelomo (첼로 협연곡으로 major repertoire입니다)
- Bliss / Color Symphony (작풍이 상당히 보수적입니다)
- Carl Nielsen / Symphony No.2 "The Four Temperaments" (제 생각에 Nielsen은 저평가 우량주입니다)
- Carl Nielsen / Violin concerto (아마 10년 후쯤 되면 지금의 Sibelius concerto의 자리에 오게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Howard Hanson / Symphony No.2 "Romantic" (쿨~ 하지요)


[3. 비올라의 필수 레파토리?]

Viola Rep로는

- Bartok / Viola concerto (Tabea Zimmermann 껄로 들어보세요)
- Hindemith / Viola sonata Op.11 No.4 (개인적으로 가장 명곡이 아닐까 싶습니다)
- Rebecca Clarke / Viola Sonata (비올리스트에게 딱 한 곡만 연주하라면 열명중 다섯은 이 곡을 정할겁니다)
- Shostakovich / Viola Sonata (죽기 마지막 작품이지요)
- Walton / Viola Concerto (혹자는 비올라의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이라고 하는데.. 저는 별로...)
- J.S.Bach / Viola da gamba Sonata (전체 세 곡인데.. 비올라로도 연주됩니다.)
- Brahms / Viola Sonata (F minor와 E-flat major가 있는데... 그야말로 비올라 곡의 대표 repertoire라 할 수 있죠)


(추천: 김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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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7 22:28

[music]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명연주?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여파로 베토벤 9번 교향곡 연주 추천에 관한 질문을 몇 번 받았다. 워낙 유명한 곡이라 새롭게 할 말도 없고, 솔직히 그동안 들어서 안좋은 연주도 별로 없었지만, 요청에 대한 최소한의 성의는 가져야하는 바, CD들을 다시 꺼내 들어보기도 하고 인근 도서관에 가서 좀 더 빌려다가 들어보기도 하였다. 개인적으로 특히 좋았던 몇 연주들을 한번 리스트업해본다. (이 바닥의 진정한 전문가들께는 송구...)  
 
1. 푸르트뱅글러(Furtwangler)
 - 바이로이트 페스티발, 축제극장 오케스트라 (1951, 라이브, EMI), 또는
 - 루체른 페스티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1954, 라이브, Tahra)

요즈음엔 푸르트뱅글러 식의 해석이 예전과 같은 수준의 인정과 환영을 받지만은 않는 모양이지만, 어쨌든 이 곡에 관한한 그가 남긴 장대한 족적을 무시하고 지나갈 순 없을 것이다. 이 연주들을 두고서는 '압도적인 감동'이라고 환호하는 사람들과 '지나친 주관주의'라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공존한다. 중후하고 로맨틱한 독일적 해석의 대표적 모델이며, '죽은 악보에 숨결을 불어넣는' 해석의 중요성 및 관객과의 호흡에 기인한 즉흥성을 강조한다. 비판적인 요소는 대개 자의적이라 할만큼 주관적인(idiosyncratic) 해석과 그때그때 달라지기 쉬운(spontaneous) 템포 때문일 것이나, Gramophone 매거진의 한 평론가의 표현처럼 곡 전반에 "massive current"가 흐른다고 할 정도의 자기 완성도와 설득력있는 장대한 드라마가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클래식에 갓 입문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무렵 합창 교향곡 자체에 매료되게 만들어준 연주는 바로 푸르트뱅글러의 51년 버전이었다. 그런만큼, 이분의 연주에 깃든 열정과 완벽한 자기 음악으로의 소화는 마치 이 곡 연주에 있어서의 'archetype' 인 것처럼 느끼게되는 경향이 개인적으론 있는 편이다. 

2. 토스카니니(Toscanini)
 -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 (1952, 스튜디오, RCA)

토스카니니의 해석은 푸르트뱅글러와는 다른 축을 형성한다. 푸르트뱅글러가 자신이 재해석한 베토벤의 전형을 만들어냈다면 토스카니니는 '나는 죽고 내 음악 안에 작곡자가 산' 연주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래서, 솔티는 "아마 정답은 이 두 축 사이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는 말로 두 사람의 존재감을 모두 인정했다. 푸르트뱅글러가 이 곡을 자신의 음악으로 재창조하려 했다면, 토스카니니는 이와 정반대의 입장에서 오로지 작곡자의 의도에 충실한 'fat-free'식 어프로취를 취했다. (푸르트뱅글러가 hermeneutic 했다면 토스카니니는 exegetic 했다고나 할까?) 템포 역시 베토벤이 지정한 속도에 따랐다고 하는 만큼, 다른 연주들에 비하면 꽤 빠른 편이다. 완벽주의자, 순수주의자로 알려진 그의 성향을 다소 느낄 수 있으며, 비록 푸르트뱅글러와는 다른 방향으로부터의 접근이긴 하지만 열정, 집중력, 그리고 다이내믹함이란 측면에서는 서로 통하는 부분도 있다. 아마도 후대의 지휘자들에게 끼친 영향으로만 볼 땐 푸르트뱅글러 이상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해석은 카라얀을 비롯한 많은 근현대 연주자들과, 더 나아가서는 최근 20여 년간 한 흐름을 만든 정격연주(authentic/periodic performance) 전통과도 맥이 닿아있는 'prototype' 이라 할만하기 때문이다. 

3. 텐슈테트(Tennstedt) 
-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85, 라이브, BBC Legend)

텐슈테트는 구 동독 출신의 지휘자인 만큼 그의 대가적 면모에 비해 카라얀, 번스타인 같은 사람들보다는 훨씬 세간에 덜 알려져있는 편이다. 주로 말러 스페셜리스트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우연찮게 도서관에서 그의 합창 교향곡 연주를 빌려서 듣고는 예상치 못한 반가운 충격을 받게 되었다. '숨은 명연'이라고 부르고 싶은 이 연주에서 푸르트뱅글러의 드라마와 토스카니니의 열정 및 집중력을 고루고루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 두 축들 사이 어딘가에 있다"는 바로 그 '정답'들 가운데 하나가 아닐런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토스카니니보다는 푸르트뱅글러 쪽에 더 가깝긴 하지만..) 사실, 위의 두 노장들의 연주를 실제로 감상하며 '즐길' 수 있는지의 여부는 그들의 연주가 훌륭하다는 점과는 또 다른 문제이다. 반세기 전의 빈약한 모노 사운드가 귀에 전혀 거슬리지 않는 사람들만이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용한 거장' 텐슈테트가 LPO를 은퇴하기 2 년전에 한 이 말년의 연주는, 열정과 서정성의 조화 및 오케스트라와의 교감도 뛰어나지만, 거기에 더해 음질도 좋고 라이브의 열기까지 더해져 있어서, 처음 이 곡을 접하는 이에게 꼭 한 연주만 권하고자 하는 경우에 추천할만한 선택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연주가 끝났을 때 우뢰와 같은 박수를 치는 관중들이 부러워지게 만드는 실황연주이다.    

4. 카라얀(Karajan)
 - 베를린 필 (1962 & 1977, 스튜디오, DG)

카라얀이 남긴 베토벤 교향곡의 여러 연주 음반들 가운데서 대체적으로 위의 두 연주를 제일 쳐주는 모양인데, 대체로 3악장 아다지오는 77년 연주가 더 아다지오스럽고, 4악장의 보컬 파트는 62년 연주가 한수 위라는 평가이다. 개인적인 선택으론, 생동감과 긴장감이 살아있고, 베를린 필의 현악 파트가 마치 빈 필처럼 들리며, 4악장의 솔로와 합창단이 뛰어난 62년 버전을 좋아한다. 카라얀은 유명세 만큼이나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대표적인 지휘자인데, 그의 해석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유려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인공적인' 그의 스타일이 62년도 연주에서는 아직 나타나지 않는디. 뿐만 아니라, 매너리즘이 아직 보이지않는 가운데 오히려 신선한 측면들을 볼 수 있는 점도 62년 버전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푸르트뱅글러나 토스카니니 시대에 비하면 불과 10년 정도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그 사이에 이루어진 스테레오 녹음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놀라운 수준이다. 무난하고 구하기 쉬운 연주이다. 

5. 반트(Wand)
 - NDR 심포니 오케스트라 (1982, 스튜디오, RCA)

독일 후기 낭만파의 음악, 특히 브루크너의 권위자로 알려진 또 다른 '조용한 거장' 반트의, 역시 만년에 이루어진 이 연주도 독일적 해석의 계보 안에서 현대적 명연주의 반열에 오를만한 연주이다. 반트는 여러 레파토리를 많이 섭렵하기보다는 자신의 주요 레파토리를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연주, 녹음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하는데, 이 연주 만큼은 너무 만족스러워서 다시 이 곡을 녹음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반트와의 개인적인 인연으로는, 마음에 꼭 드는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연주를 아직 찾지못하고 있었을 때 그의 베를린 필과의 연주가 이 목마름을 완전히 해소시켜주었던 일이 있었다. 중후함과 섬세함을 조화시키는 그의 장기가 잘 발휘된 경우였는데, 여기서도 비슷한 그의 시그니처를 엿볼 수 있다. 한편, 이 연주는 퀄리티 측면 외에도, 상당히 저렴한 가격($5~7)에 구입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6. 벤스케(Vanska) 
 - 미네소타 오케스트라 (2006, 스튜디오, BIS)

북구 출신답게 원래 시벨리우스 등의 음악으로 이름을 날렸던 벤스케가 미국으로 이주해서 무명의(역사는 오래되었지만..) 미네소타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화제를 불러일으킨 베토벤 교향곡 싸이클의 일부이다. 마치 토스카니니 스타일의 현대판 버전인 듯한 느낌도 들며, 3악장의 메마른 느낌을 참을 수 없게 만들곤 하는 이전 정격연주들에 비해서는 한층 풍성한 느낌이다. 그러나, 명료하면서도 리듬감과 질감이 뛰어난 그의 연주의 진가는 역시 빠른 악장들에서 더 잘 나타난다. Jonathan Del Mar라는 음악학자가 십여 년간 옛날 악보를 대대적으로 수정하여 97년에 발표한 Barenreiter 에디션의 신 악보를 기초로 연주된 만큼, 합창 교향곡의 현대적 해석의 현주소가 궁금한 사람에겐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진만을 시작으로, 아바도, 노링턴, 래틀, 맥케라스 등 현대의 많은 연주자들이 이 악보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http://www.baerenreiter.com/html/lvb/index.html 참조)  한편, SACD 겸용인 이 씨디는 음질이 매우 중요한 이슈인 audiophile들에게서 선호될만한 선택이기도 하다.
그 외, 합창 교향곡의 매력에 처음으로, 또는 다시금 빠져들게 할만한 영상물 두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는, 역시 '베토벤 바이러스'이다. 전체 드라마의 중간 쯤에 나오는 두 번째 연주회에서 이 곡이 연주되는데, 이 곡에 대한 관심을 새로와지게 만드는 '비쥬얼의 힘'이 있는 것 같다. 특별히, 인생의 스토리들이 음악적 내러티브에 새로운 호흡을 불어넣는 설정이 나름 음악적 인사이트를 강화시켜주는 면이 있었다.

두번째는, Ed Harris가 베토벤으로 나오는 'Copying Beethoven'이다. 스토리 자체야 픽션이지만, 음악을 중심축으로 해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점에 대해서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일종의 감사한 마음마저 들게 한다. 여기서도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합창 교향곡이 주요 부분 발췌의 형태로 전곡 연주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음악의 각 부분부분에서 등장인물들이 서로 교감하는 모습이 이 곡에 대한 새로운 감흥을 불러 일으켜준다.  


(revised, 3/29, 1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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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2 23:42

[music]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 - by Furtwangler & Berlin Phil. (1943)

베토벤은 음악가로서 치명적인 청력 상실의 고난과 싸우며 불후의 명작들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작곡자이자 피아니스트로서 원래 연주방면으로 보다 많은 활동을 하고있던 그가 훗날 작곡에 '전념'하게 된 것도 어쩌면 이런 고난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선배 작곡가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그만의 '장르'를 개척할 뿐만 아니라 곡들 자체의 깊이에도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나는 그의 'Middle Period'의 시작점이 청력 상실이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는 시기와 오버랩된다는 점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운명'으로 더 잘 알려진 5번 교향곡과 6번 '전원' 교향곡은 그의 청력 상실이 본격화되어가는 시점에 착상되어 거의 같은 시기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처럼 서로 전혀 상반된 분위기의 두 곡을 동시에 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다는 점으로부터도 당시 그의 내면에서 겪고 있었을 감정적 동요와 굴곡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7번 교향곡은 그가 더이상 아무 것도 들을 수 없게 된 시점인 1812년에 작곡되었다. 완전한 청력 상실이 이제 현실로 다가온 시점에서 쓴 첫 곡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곡은 전반적으로 밝고 역동적인 느낌을 주지만, 2악장에서 만큼은 그의 마음 깊은 곳에 흐르고 있었을 절제된 아픔과 슬픔에 대한 단상을 숨기지 않고 보여준다. 최근의 "베토벤 바이러스"나 예전의 "Mr. Holland Opus" 같은 드라마/영화를 보면 등장인물이 청력을 상실하는 장면에 이 2악장의 선율이 흘러나오는데, 이러한 곡의 배경을 생각하면 매우 적절한 선곡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세기의 연주가들 가운데 베토벤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의 하나는 단연 지휘자 푸르트뱅글러이다. 그는 레코딩 및 라디오 기술의 태동과 시대를 같이하며 '수퍼스타 지휘자' 시대의 문을 연 사람으로 기억되기도 하지만, 그의 생을 이야기할 때 나치 독일 치하에서 겪은 고난과 영욕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 점은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일찌기 30년대 초부터 나치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었다. 유태계 작곡가 힌데미스의 곡이 금지 처분되었을 때에는 맡고있던 여러 자리로부터 사임하기도 하였다. 그의 망명설이 흘러나오면서 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국으로부터 상임 지휘자 제안이 밀려들기도 하였지만, 막상 전쟁이 일어나고 나치의 잔혹성이 만천하에 드러나기 시작하는 때에 그는 오히려 본국에 머물 것을 결정하였다. 이를 두고 한편에서는 '자기 조국으로의 망명'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였고, 다른편에서는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나치의 선전에 활용된 면을 들어 그의 본국체류 결정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물론 나치 협력에 관하여 그에 대해 이루어진 모든 고발은 전후에 벌어진 재판 및 심사 과정에서 모두 무혐의로 선언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유대인 음악가들을 숨겨주고 탈출을 도왔던 사례들이 후에 알려지기도 하였다. 종전 직후에 예후디 메뉴힌과 같은 유태인 음악가들이 종종 그와 협연한 사실은 많은 유태인들이 심정적으로 그를 지지했음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오히려 그는 나치의 지배하의 조국에서 마음속으로 울고 있었던 듯하다. 그가 종전 재판 과정에서 한 말을 들어보자.
 
"독일은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었고, 나는 독일 음악에 대해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이 위기 상황에서 가능한 한 살아남는 것이 나의 임무였습니다. 나의 음악이 (나치의) 선전에 오용될 수 있다는 우려는, 독일인들에게 주어진 음악을 지켜야만 한다는 더 큰 우려 앞에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바하와 베토벤, 모짜르트 및 슈베르트와 같은 혈통을 지닌 이 사람들은 이제 전면적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힌 정권의 컨트롤 아래에서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이 상황 안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그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 판단할 수 없을 것입니다...

'히믈러(유태인 대량 학살의 기획/실행자)의 독일' 치하에선 베토벤 음악이 연주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히믈러의 공포 아래에 살고있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자유와 인류애라는 베토벤의 메세지에 그 누구보다 더 필요와 갈망을 느끼는 사람들이 아니었겠습니까? 나는 그들과 함께 머물기로 했던 일에 대해 후회하지 않습니다."

(from Wikipedia; "The Furtwangler Record" by John Ardion)

여기에 링크된 연주는 1943년도 베를린필의 전용 연주회장에서 이루어진 연주 실황녹음이다. 당시 나치는, 지휘자를 체포하겠다, 교향악단을 해체하겠다, 연주자들을 모두 군대에 보내겠다, 하는 식으로 협박과 회유를 반복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43년 당시는 또한 유태인들이 수용소에서 본격적으로 죽어나가고 있는 시점이었으며, 그럼에도 나치 독일은 아직 유럽의 여러 곳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형통함'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 '악인'이 다름아닌 자신의 나라라는 자괴감, 그리고 자신들 각자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 등이 아마도 복잡하게 연주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본 연주가 이루어진 베를린필 전용 연주장은 몇달 후인 44년 1월에 폭격으로 완전히 무너지게 될 만큼 그들은 전화의 한 가운데에 서있었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이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현이 울고있는 듯한 환청에 잠기며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한다.  

이 연주에 대한 고난은 작곡자와 연주자들의 것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45년에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은 이 녹음 마스터를 포함한 베를린필의 연주녹음 테입들을 모두 소련으로 압송해갔다. 테입이 본 주인들의 손에 되돌아오기까지는 앞으로 공산주의가 몰락하는 데 걸려야할 40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렇듯 본 연주는 한 시대와 인간의 실존적 고난에 대한 여러가지 방향의 증언을 담고 있다.  

이 음악을 들으면 늘 떠오르곤 하는 한 사람이 있다. 이 음악이 연주되고 있을 같은 무렵 같은 독일 땅 어딘가에서 차가운 감방에 갇힌 채, 안으로는 "나는 누구인가?" 고뇌하고 삶으로는 '그리스도의 사람'다운 양심과 온화함을 몸으로 보여주던 디트리히 본회퍼가 바로 그이다. 그 또한 모든 망명 제의와 권유를 뿌리치고 "그들과 함께 고난의 현장에 있기 위해" 동포들이 있는 독일로 다시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피아노에 능했던 그도 음악을 무척 사랑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푸르트뱅글러가 말하는 '자유와 인류애'의 메세지가 그 이상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작곡도 연주도 녹음도 모두 어떤 '이야기'들을 담고있기에 우리에게 오늘날 또 다른 이야기를 불러일으켜주는 이러한 연주야말로 '인류 문화유산'이라고 불러지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실존적 고난의 현장 한 가운데에서 자신들의 마음을 노래했고 다른이를 위로해온 음악이었기에, 오늘날 고난의 현장에 서있는 이들에게도 이 음악은 그들의 상한 마음과 영혼을 어루만지는 손으로서 동일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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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4 00:50

[music] Bach, "Liebster Jesu, wir sind hier" BWV 731- by Albert Schweitzer (1936)

슈바이처 박사는 의사, 인류학자, 신학자로서, 자신의 삶으로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에게 헌신했을 뿐만 아니라
구미의 수많은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좋은 동기로' 아프리카를 향하도록 만들었던 실천적 지성으로 잘 알려져있다.

그에 비해,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가 또한 당대에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 오르가니스트였다는 점이다.

그는 매일 아침 이른 새벽에 교회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서 바하의 곡을 오르간으로 연주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강요함이나 서두름 없이 원주민들의 영혼을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가꾸어 주겠다는 의도에서였다.

그의 30년대 바하 곡 연주 음반들은 지금까지도 전해오는 '인류의 문화유산'인데, 작품번호 731번 코랄전주곡
"Liebster Jesu, wir sind hier" (Beloved Jesus, We are Here)는 그 가운데서도 백미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연주 & 녹음: 1936년)

클래식에 큰 흥미가 없더라도 들으면 느낄 수 있도록 '큰 사랑'과 '영혼의 고귀함'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이 곡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의 마음 또한 훈훈하게 적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최고의 작품, 최고의 연주이다.

오늘날 쉽사리 찾아보기 어려운, 참 인간의 '영혼'과 '정신'의 무게가 담긴 음악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런지...


('소개한 이'를 능가하여 appreciate하는 '소개받은 자(SJ)'와 이 유산을 함께 누림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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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22 15:59

"Heavenly" 교향곡과 함께 여는 아침

분주한 아침 준비를 마치고 기차 시간에 맞추어 역에 도착해 이윽고 기차 위에 몸을 실었다.
이제서야 드디어 들고 온 빵과 커피를 마음놓고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온 것이다.

무사히 기차 시간에 맞추어 도착한 것에 짧게 감사 기도를 드리고 한숨을 거두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CD 플레이어의 버튼을 누른다. 오늘 이 안에 들어있는 CD는 말러의 4번
교향곡, 일명 "Ode to Heavenly joy"이다. 지휘는 브루노 발터. 컬럼비아 교향악단 연주.
1945 년 녹음.

3 악장이 시작되자 현악의 흐름이 파도처럼 다가온다.

평화.

잔잔하고 고요하되 큰 파도처럼 힘있게 밀려들어오는 평화다.
고요한 기도시간 중에, 특별히 그분의 마음과 맞닿은 것을 느끼게되는 순간에 부어주시는
그 평화와 어딘가 모르게 닮은 점이 많은 것 같아 특별히 좋아하는 곡이다.

리스트를 보니 3 악장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있다. 
"Ruhevoll, poco adagio"  (Peacefully, somewhat slowly)

이 곡은 어린 아이의 눈으로 천국의 모습을 바라보는 이야기를 담은 한 가곡을 동기로하여
만들어진 곡이다. 음악적으로 원숙해진 말러의 음악이 점차 복합적이고 역동적이어져가는
가운데 조용한 섬처럼 쉬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 그의 4번 교향곡이다.
그의 교향곡들 중에서 악기편성도 제일 수수하고, 길이도 가장 짧은 곡이다. 4 악장에
원곡인 그 가곡이 나오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단연 3 악장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도입부에서 파도처럼 밀려드는 평화의 선율을 좋아하여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듣곤 한다.  

좋아하는 곡이다보니 여러 연주를 모으게 되었다.
화려한 해석(카라얀), 장중한 해석(클렘페러), 담백한 해석(아바도), 현대적 소편성의
해석(하딩), 다 나름의 맛이 있다. 그런 가운데, 발터의 연주는 그 나름의 '진한' 맛을 낸다.
우선 그 자신 많은 말러의 곡을 초연한 수제자인 만큼 서로 통하는 점이 많아서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말러의 예민하고 다소 심각한 세계는 발터의 인격적 따뜻함과 만날 때에
비로소 완전(?)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따뜻한 인격자' 발터의 연주일지라도 듣다보면 종종 불안과 긴장감이
느껴지는 대목들이 있다. 오스트리아생 유태인으로 나치 유럽에서 벗어나 미국에 망명한
그가, 독일계 유태인인 말러의 곡을,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유태인 망명자들로 주로 구성된
컬럼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1945 년에 연주한 점을 생각하면,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다.  

오히려 어쩌면 그렇기에 더욱 곡의 진가가 드러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안과 긴장의
한복판에서 음악적 상징으로 노래하는 '천국'이기에...

4 악장에 나오는 가곡의 가사에는 베드로와 요한과 마르다의 이름들이 나오고, 특히
죽임당하는 어린양의 이야기가 나온다. 내용을 가사로 나타내고 중심이 되는 선율이 제시
되는 만큼 가장 중요한 4 악장이지만, 오히려 가사 없이 변주곡의 형태로 제시되는 3 악장
에서 내 자신의 상상이 작용할 수 있는 공간을 더 발견하곤 한다.

이 아침 분주한 삶의 현장 한가운데서 음악 덕분에 기억된 '평화'에 용기를 얻어 이 하루를
'평화를 갈망하는 날'로 삼아본다. 거짓 평화가 아닌 '참 평화' - 이 earthly한 삶의 온갖
아우성들 한 복판에서 천국과 화목케하는 바로 그 heavenly한 평화를 갈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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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6 18:35

[이코스타 기고] 바하의 “마태수난곡”과 더불어 묵상하는 예수님의 고난 (4/2004)

최근에 멜 깁슨이 감독한 “The Passion of the Christ” 영화가 개봉되어, 여러 논란이 있는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고난의 무게에 관한 강렬한 영상으로 많은 이들에게 도전을 주고 있다.  이 영화로 인하여 믿는 자들의 신앙이 새로와지고 믿지 않는 자들이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 관심을 갖게되고 있다는 소식은 금년의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특별한 의미를 더하여 주고 있는 듯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백 팔십 년 전 유럽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었는데, 그 당시에는 영화가 아닌 요한 제바스티안 바하(Johann Sebastian Bach)의 음악들이 그 매개체가 되었고, 그 한 가운데에는 마태수난곡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바하의 모든 음악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 “합창 음악의 최고봉”, 더 나아가서는 인류 음악 예술의 최고 걸작등 찬사를 아끼지 않는 작품이건만, 당시에는 난이하고 복잡하게만 받아들여진 탓에 작곡된 무렵에 세 번 정도 연주된 이후로는 근 백 년간이나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잊혀지게 된다.  그러던 것을 당대의 작곡가 겸 지휘자였던 멘델스존이 발굴하여, 작곡된지 꼭 백 년이 되는 해에 다시금 연주하여 열렬한 반응을 얻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에 대한 각성과 신앙적인 도전이 이루어짐은 물론, 당시 전 유럽을 휩쓸고 오늘날까지도 맥을 이어 내려오는 바하 르네상스’ (“바하의 음악으로 돌아가자는 음악 무브먼트) 의 싹이 틔여지게 된다.1)  바하 음악이 지니는 완벽함과 순수함,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경건함으로 나타나는 그의 음악의 깊은 정신성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음악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반향이었던 것이다.  

 
마태수난곡은 바하가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학교와 교회에서 칸토르(음악감독)로 지냈던 그의 장년기 시절에 만든 작품으로, 마태복음에 나와있는 예수님의 수난 부분(26, 27)을 기본 텍스트로 하여 작곡된, 연주 시간이 세 시간 반이나 걸리는 대곡이다.  비슷한 시기에 작곡되었고 백 년 후에는 이미 상당히 유명해져 있었던 헨델의 메시아 3부로 구성된 전체의 한 부분( 2)을 예수님의 수난에 할애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바하의 수난곡들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다.2), 3)  당시에는 네 개의 복음서를 바탕으로 한 각각의 수난곡들이 존재하였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마가수난곡은 분실되었고 누가수난곡은 후세의 위작으로 여겨지고 있는 까닭에 현재에는 마태수난곡과 이보다 몇 년 앞서 작곡된 요한수난곡만이 연주되고 있다.  음악적인 면을 살펴보면, 독창자들과 두 개의 합창단 및 두 개의 오케스트라가 솔로에서 이중 합창에 이르는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다양한 음악적 기법들이 동원되어 예수님, 성경 나레이터, 베드로, 빌라도, 군중들 등 다양한 인물들의 심리 전개와 그에 따른 일련의 사건의 흐름들을 그림을 그리듯 묘사하고 있다.  개별 곡들은 단순한 모음집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의 미적인 통일체로서 파악되는 전체적인 구조를 가지며, 이 안에는 회화적인 특성과 상징적인 표현들이 풍부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극적인 묘사들, 정열과 냉정함, 드라마적인 요소와 정신적인 요소 등 다소 상반된 성격의 측면들이 조화 속의 대비를 이루는 가운데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음악 자체만으로도 비할 바 없이 뛰어난 이 모든 기법들이라 할지라도, 작곡자 자신의 신앙 고백으로 승화된 주님의 십자가 고난의 메세지를 음악을 듣는 이들에게 같은 감동과 도전으로 전달하기 원하는 작곡자의 의도를 놓치는 경우에는 이 음악 작품이 가지는 진정한 가치와 기능에 대한 온전한 자리매김을 이루기란 어렵다.   

     
바하의 마태수난곡이 단지 음악적으로만 위대한 작품이 아니라, 작곡자 자신의 신앙이 음악을 통하여 표현되고 승화된 것이었다는 점에 관하여, 그의 부인 안나 막달레나 바하는 남편이 작고한 얼마 후에 그가 마태수난곡을 작곡하던 때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어느날 그의 방으로 불쑥 들어갔을 때, 마침 그는 마태수난곡의 알토 독창 , 골고다를 작곡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평안하고 안색도 좋았던 그의 얼굴이 완전히 눈물로 범벅이 되어 어두워진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와 그의 방문 옆 계단에 앉아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곡을 쓰면서 비통해하는 모습을 내가 보았다는 사실을 끝내 모른 채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도 나는 그 사실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하나님만이 볼 수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이 곡을 쓰고 있었을 때, 그는 간절하게 구원받기를 원하는 영혼들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숭고하심과 그 비밀들에 관하여 깊이 느끼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이후 한 수난절에 토마스 교회에서 마침내 연주된 마태수난곡을 듣게 되었을 때 나는 영혼을 뒤흔드는 감동으로 벅차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곡에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너무 난해하고 상당히 많은 연습을 하지 않으면 연주하기가 어려운 곡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마 언젠가는 그 음악을 천국에서 다시 들을 수 있겠지요...  (안나 막달레나 바흐 저, “내 남편 바흐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음악의 아버지로 추앙하고 있으며 수 많은 연주자들과 음악학자들이 자신의 평생을 바칠 만한 순수 서양 음악의 시작이요 완성이라고 여기고 있는 바하.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이 생각한 음악이란, 루터 신학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explicatio textus (interpreting texture)” 였으며, “praedicatio sonora (resounding proclamation)” 이었다.  , 그에게 있어서의 음악 철학이란,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그분을 계시하는 예배의 행위, 그러한 목적에 사용되도록 인간에게 허락하신 또 하나의 언어와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일찌기 바하 음악에 깊이 심취하였던 슈바이처 박사(Albert Schweitzer)는 이러한 바하의 음악의 본질적인 면모를 일컬어,

 
그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예배의 행위이다. 따라서 모든 예술, 심지어는 세속적인 것들마저도 그에게는 신앙적인 표현의 대상이 된다. 그 결과로 그의 음악은 가장 깊은 기도와도 같이 하나님께 상달되는 그 무엇이 되고 있다

 

라고 평한 바 있다.  학교의 음악감독으로 있으면서 때로는 학생들에게 직접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던 바하는,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을 늘 깊이 묵상하였으며, 자신이 직접 묵상하고 연구한 점들은 본문 옆에 스스로 주석으로 달아놓곤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가 소장했던 성경책의 역대하 5장 부분을 보면, 솔로몬이 성전 봉헌 제사를 드렸을 때 찬양대와 기악대가 함께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기 시작하자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과 같이 임하였다는 대목이 나오는 13절 옆에다 바하는 자필로 다음과 같은 주석을 적어놓았다고 한다. 

 

경건한 음악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하신다! 

 

어쩌면 이 말이야말로 작곡가로서의 바하의 일생을 지배한 그의 삶의 동기요 소명이자 간증을 가장 적절한 말로 표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격적인 작곡 활동의 첫 소산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첫 칸타타의 제목이 하나님은 나의 왕4) 이었으며, 숨을 거두기 바로 며칠 전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작곡한 오르간 코랄전주곡의 제목이 주의 보좌 앞으로 이제 나아갑니다였다는 점은 이러한 측면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사실 그의 작품들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수난을 기리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한 흔적들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백 여 개나 되는 칸타타와 수난곡 등 직접적인 찬양 가사가 달려있는 합창 음악들이나, 성경 말씀을 멜로디로 표현한 수백 개의 오르간 곡들은 우선 그 직접적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슈바이처 박사가 말한 세속적인 것에 묻어있는 성스러움이라는 측면은, 일반인들이 좋아하는 쾨텐 시절의 기악곡들 무반주 첼로곡, 평균율 피아노곡, 각종 기악 협주곡들 등 으로부터 커피 칸타타’, 결혼 음악 등과 같은 세속 주제에 의한 곡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곡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신성을 그 문맥에 실어 노래하고 있다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입증은 아마도 직접 들어보는 것으로써 가능할 것이다.5)  몇 년 전에는 한 연주가가 그러한 고백을 했던 것이 알려지기도 하였는데, 현존하는 가장 손꼽히는 피아니스트의 한 명인 머레이 퍼라이아(Murray Perahia), 연주자의 길을 거의 포기할 뻔한 위기를 넘긴 직후 골드베르크 변주곡6) 을 녹음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이 변주곡들은 각각 예수님의 다양한 사역을 표현하고 있으며, 특히 25번 변주곡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연상시킨다.” 

 

한편, 당대 최고의 오르간 연주가이자 바하 전문가이기도 했던 슈바이처 박사는, 바하의 음악에는 인간 정신의 깊이가 담겨있고 영성이 있으며 내적 평화가 깃들여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음악들에는 무의식 중에라도 사람들의 영혼을 일깨우는 힘이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아프리카에서 사역하는 동안 원주민들의 정신과 영혼을 가꾸는 데 도움을 준다는 생각으로 매일 아침 교회의 문을 열어놓고 바하의 오르간 음악들을 연주해 들려주었다고 전해진다.7)  그리고, 그런 노력은 슈바이처 자신의 사랑 및 섬김의 삶과 더하여져 영혼들을 일깨우고 변화시키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이와 같이, 바하의 음악은 조금만 귀기울여 들으면 그 안에 주님의 흔적이 직간접으로 가득히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그 안에는 참다운 의미에서 영혼을 울리는힘이 있음을 우리는 또한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바하의 음악에 보편적으로 영성에 관련된 측면이 묻어있다는 점은, 마태수난곡이 지닌 면모가 그의 음악들 중 결코 이 한 곡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다른 모든 곡들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주님의 흔적이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된 곳 그 정점에 마태수난곡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곡이 지니는 의미에 대한 가장 훌륭한 찬사이기도 한 것이다.   

     
, 그러면 이제 마태수난곡의 개별 곡들을 일부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도록 하자.

     
1곡은 전 곡을 여는 도입 합창으로, 두 개의 합창단이 주고받으며 엮어내는 장엄함과 엄숙함은 주님의 고난의 메세지를 파도와 같은 감동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 음악을 듣는 동안 우리의 마음가짐은 주님께서 고난당하셨던 그 현장에 찾아온 듯 옷깃을 여미는 마음으로 준비된다.  음악적으로도 완벽한 대위법적 어법은, 이 곡을 능가하는 대위법적 합창곡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도무지 갖지 못하게 할 정도로 합창 음악의 극치를 들려주고 있다. 

     
음악으로 그림을 그리는 듯한 표현법은 전 곡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길게 늘여서 연주하는 현악 반주로 예수님을 둘러싼 빛을 표현한다든가, 마리아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대목에서 플룻이 스타카토로 떨어지는 음을 연주하므로써 예수님의 발 위에 떨어지는 눈물을 묘사하고 있는 점, 그리고 예수님이 감람산에 오르시는 모습을 베이스가 상승하는 음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예수님이 잡히신 장면을 묘사하는 제 33곡에서는, 주님을 따르는 여자들을 묘사하는 알토와 소프라노의 이중창이 나의 예수님이 이제 잡히셨네하면서 느리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는 동안, 군중을 나타내는 합창은 격정적이고 빠른 멜로디로 놓아줘! 잠깐, 묶으면 안돼!하며 다급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한 곡 안에서 서로 전혀 다른 분위기와 템포의 멜로디들이 절묘하게 조화되는 이런 모습들은 마치 여러 영상이 시각적으로 오버랩되는 듯한 느낌을 연상시켜 주므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감정이입이 일어나는 것을 돕는다.

    
47번곡(버전에 따라서는 39)은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한 직후에 부르는, 아마도 전곡에서 가장 유명한 알토 아리아인데, 바이올린의 애를 끊는 듯한 독주를 타고 베드로의 애절한 심경이 노래된다.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이렇게 울고 있나이다. 마음도 눈도 아프게 울고 있는 나를 보소서...  때로는 나 또한 베드로와 같은 입장에서 이렇게 주님께 참회의 기도를 드려야 했었음을 돌이켜 생각할 때, 이 노래는 내 마음 안에 밀려들어 공명하는 나의 노래가 된다.

     
이어서, 숨가쁘게 진행되는 재판 과정,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의 애처로운 모습, 격앙된 군중의 반응,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 아프게 바라보는 여인들의 애닲은 마음들, 돌아가시고 난 후 지진이 일어나며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는 장면 등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성경의 이야기들이 한 편의 드라마로서 펼쳐지고 난 후에, 맨 마지막으로 찬송가 145(“오 거룩하신 주님”)에 수록되기도 한 종결 합창8)으로 마무리되면서 주님의 수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마지막으로, 바하의 마태수난곡과 같은 작품이 오늘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유익은 무엇이며,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주신 소명에 충실하기 원하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지에 관하여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는, 우리에게 문화 유산이라는 형태로 이미 주어진 이러한 삶의 자원들이 우리의 일상적인 공간들을 더욱 주님으로 풍성한 곳이 되도록 만드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가장 직접적인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적 문화 유산들의 유익이 될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자신의 일을 통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을 계시하고 경배하는 수고를 그치지 않았던 한 신앙의 선배를 통하여, 오늘 우리가 주님을 묵상하며 깊은 교제를 나누는 일에 또 하나의 본보기와 길잡이를 삼을 수 있다는 점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들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 삶을 그분의 온전한 작품이 되도록 가꾸어 가야할 것인데, 그런 면에서 이러한 작품들이 뜻밖에도 우리에게 지속적인 격려와 도전을 주는 매개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을 조명한 한 영화가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깊은 묵상을 도와주었듯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기 위하여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혹자는 일컫기도 하는 바하의 음악들과 가까이 하는 일 또한 보다 다른 각도에서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고 묵상하는 일에 도움과 동기 부여를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본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 어느 때보다 그분의 고난의 메세지에 가까이 다가서며, 주님 서신 그곳에 동참하라 부르시는 부르심에 순종하는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내 안에 깊이 새겨지는 이번 사순절과 고난 주간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각각 제 길로 갔으나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입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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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바하 음악의 순수음악적인 측면과 기술적인 측면들만이 남고, 정작 그의 삶의 철학이요 근본적인 창작의 동기가 되었던 신앙적인 측면이 도외시되어 가는 것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깊은 아쉬움을 느낀다. 

 

2) 같은 해(1685)에 독일의 이웃 동네에서 태어난 헨델과 바하는 동시대를 산 위대한 음악인들이었지만, 헨델이 영국 왕실의 지원 아래 부귀와 전유럽에 걸친 명성을 누렸던 것과 달리, 바하는 때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기도 하였으며 그의 명성 또한 주로 독일 국내에 국한된 것이었다.  더우기, 바하의 음악은 그의 사후에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상당 부분 잊혀져 오고 있었다.

 

3) 헨델의 메시아가 이전에 나온 “Jesus of Nazareth” 등과 같은 주님의 일대기 영화와 같은 방식이라면 바하의 수난곡들은 멜 깁슨의 “The passion”과 비슷한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4) 결코 신동이 아니었던 그의 작곡가로서의 경력은 열 살 전에 이미 교향곡을 작곡한 모짜르트와는 달리 2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주어진 시간 사용을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응답이라고 여겼던 그는 그 누구보다도 많은 작품을 남기고 갔다. 그에게는 작품 번호가 매겨져 있는 작품들이 1080 가지가 있으며, 세 시간 반이 걸리는 마태수난곡도 그 중 한 번호(BWV 244)를 부여받고 있다.

 

5) 바하의 음악이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평화가 어떤 것인지 우선적으로 느껴보기 원하는 분은 (Karl Richter 등이 지휘한) 칸타타 140시온은 파숫꾼의 노랫소리를 듣는도다”, 147예수, 나의 기쁨되시네 (Helmut Walcha 등이 연주한) 오르간 코랄 전주곡 BWV 639, BWV 731 등을 들어보기를 권장한다.  가사가 없는 일반 기악곡들 또한 얼마나 정신적 순수함과 영적 경건함을 이끌어내어줄 수 있는지 경험해보기 원하는 분께는 (S. Richter 등이 연주한) 평균율 피아노곡집이나 (Fournier, Maisky 등이 연주한) 무반주 첼로 조곡을 추천한다.  바하의 음악이 어떠한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하는지, 그의 음악이 어떠한 평화를 가져다 주는지에 대해서는, 직접 느껴보지 않고서는 필설로는 설명이 어렵다고 생각된다. 

 

6) 주제곡인 아리아(aria)에 대한 30 가지의 다양한 변주가 덧붙여진 바하의 유일한 변주곡(BWV 988)으로, 그 완벽함과 즉흥성의 조화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는 물론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이 곡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게끔 만드는 그 어떤 매력이 있다.  여기의 주제곡은 바하의 음악들 중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다른 소품들과 더불어 안나 막달레나 바하를 위한 곡집에도 삽입되어 있다.

 

7) 슈바이처 박사가 영혼을 매만지는 사랑을 담아 연주한 바하의 오르간 곡 연주들은, 그가 당대 최고의 오르가니스트였던 만큼 그 녹음이 현재에도 남아서 일부 (음반 석 장의 분량으로) 전해지고 있다 (1930 년대 후반; EMI Record).  위에서 추천한 BWV 731 (“사랑하는 예수님, 저희가 여기 있나이다”) 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한껏 묻어난 그의 바하 연주를 대표할 만한 곡이다.   

 

8) 원래 해슬러(Hassler)가 작곡한 이 곡은 바하가 특별히 애착하여 요한수난곡에서 도입 합창으로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마태수난곡에서도 다섯 번이나 반복되어 나온다.

  

현재 시중에는 마태수난곡 연주를 수록한 좋은 음반이 많이 나와 있다. 크게 현대적 악기 편성을 사용한 방식과 원전 악기(periodic instrument)를 사용한 방식의 두 가지 연주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마태수난곡 연주의 모범적인 전형을 세운 칼 리히터(Karl Richter)의 연주(Archiv; 1958)는 전자의,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애절하고 감미로운 음악으로 승화시킨 가디너(John Eliot Gardiner)의 연주(Archiv; 1988)는 후자의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연주로 호평받는 것으로는, 아르농쿠르(Harnoncourt)의 신작(Teldec; 2001), 헤레베헤(Herreweghe)의 신작(Harmonia Mundi; 1999), 그리고 일본인 스즈키(Suzuki)의 연주(Bis; 2000) 등이 통상적인 명연주들로 꼽히고 있다.  경제성과 쉽게 친숙해질 수 있다는 측면을 고려하면, 처음에는 주요 곡들로만 구성된 하이라이트 음반으로 시작해서 나중에 전곡 감상에 도전하는 방법도 권장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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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6 10:31

초심자를 위한 클래식 음반 24선

J. S. Bach

1. Well-tempered Claver vol. 1 & 2 (Sviatoslav Richter)
   ~ lyrical & contemplative – one of its kind interpretation! 

2. Goldberg variation  (Murray Perahia)
   ~ well-rounded… plus spiritual also! 

3. St. Matthew Passion  (John Eliot Gardiner or Karl Richter: 전곡 또는 highlight)
   ~ world heritage music in the form of a great drama (JEG) vs. formal standard (KR)     

4. Brandenburg Concertos  (Harnoncourt, Pinnock, Richter, Hogwood...  구하기 쉬운 )
   ~ so many aspects to narrow down to one…
 

5. Cello Suites  (Fournier)
   ~ authentic dignity – a modern day standard 

6. Violin Sonatas & Partitas  (Szeryng)
   ~ warm & unassuming yet virtuoso enough 

7. Violin Concertos  (Manze & Podger)
   ~ intelligent passion – a very refreshing Bach

8. Albert Schweitzer plays Bach, Vol.2 (특히 BWV 731)
   ~ beyond description/judgment 

 

Vivaldi

9.  Il cimento dell'armonia e dell'inventione, Op.8 “화성과 창의에의 영감(Biondi & Europa Galante)
   ~ a dynamic & lively Vivaldi (유명한사계 작품에 포함되어 있음)
                   

 

Handel

10.  Messiah  (Hogwood)
   ~ periodic w/ boy sopranos; fresh yet profound & ingenious

 

Haydn

11.  The Creation  (Karajan)
   ~ awe-liftingly performed choral masterpiece!     

 

Beethoven

12.  Violin Concerto (“Legend: David Oistrakh”)
   ~ rich, gentle, exquisite… real legend! 

13.  Piano Concerto No.5  (Brendel: with any conductor)
   ~ splendid, clear & sensitive

14.  Symphony No. 5 & 7  (Kleiber)
   ~ second to none in rhythmic genius & vitality  

15.  Symphony No. 6  (Walter)
   ~ the most pastoral “Pastoral” 

16.  Symphony No. 9  (Furtwangler)
   ~ heavenly manifestation! 

                              

Mozart

17.  Clarinet Concerto, etc.  (Printz & Bohm)
   ~ graceful beauty   

18.  Le Nozze di Figaro “피가로의 결혼” (Bohm: 전곡 또는 highlight)
   ~ all-rounded 

 

Dvorak

19.  Cello Concerto  (Rostropovich)
   ~ expansive & magisterial 

 

Schubert

20.  Arpeggione Sonata  (Rostropovitch & Britten)
   ~ sublime cello representation 

                    

Chopin

21.  Waltz  (Lipatti)
   ~ noble tone & mind – a world heritage recording!

 

Rachmaninoff

22.  Piano Concerto No. 3  (Argerich & Chailly)
   ~ (red hot!) passion & concentration (1)

 

Tchaikovsky

23.  Violin Concerto  (정경화 & Previn)
   ~ (Korean’s own!) passion & concentration (2)

 

Puccini

24.  La Boheme  (Tebaldi, etc. & Serafin)
   ~ many people’s favorite or first-love opera 

 

           

선정기준: 초심자를 위한 '메이저' 작품, 들어서 좋은 곡, 정신과 영혼을 담은 작품/연주,
              현재 쉽게 구할 수 있는 음반


[안상현 간사님에게 추천하기 위한 목록으로 최초로 만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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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6 10:01

클래식 음악 평론가를 꿈꾸다

15 년전, 진지하게 음악을 듣기 시작했을 때 가졌던 '소박한' 꿈은 나중에 프리랜서 클래식 음악 평론가가 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관련 서적이 흔치 않았으므로, 미국, 영국, 일본 서적들을 교보문고 원서부에 가서 구하여 탐독하곤 했다. 그 결과로, 어떤 곡을 대하면 장르, 역사적 의의, 시대적 배경, 작곡 사연 등 '기본 정보' 뿐만 아니라 어느 연주가의 언제 연주가 어느 정도로 평가된다는 식의 음반 정보도 제법 꿰고 있었다. 음반 유통이 제한적이던 당시, 국내 레코드샵에 가서 진열된 음반을 보면 약 70~80% 정도는 앨범 커버만 보아도 저 연주가 어떤 특성과 어느 정도의 퀄리티를 가지는지를 대충 알 수 있었다. (...고 당시에는 생각하였다..)
   
지금은... 사실 잘 모르겠다. 감상을 돕는 수준에서의 '음악 평론'이라는 것에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는 일인지 조차도...

평론가들에게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평가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귀에 듣기 좋은 음악만 주로 추천한다'는 식의 이야기일 것이다. 비록 그 자신 음악가는 아니지만, 끊임없이 창조하고 생각하며 기존의 벽을 넘어 도전하는 시대적 작가정신의 동일 선상에 함께 서있어야 진정한 평론가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기존의 지평을 넓힌 정말 새로운 음악이나 해석이 등장하면 평론가는 기뻐하는가?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는 그야말로 본인이 잘 모르는 세계가 눈 앞에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아연 긴장하여 불편해하거나 거기서 도가 지나치면 공연히 신경질적으로 폄하하는 기득권자적(?) 모습으로 반응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러한 '어리석은 평론가'의 예는 고금에 허다하게 많다. '평론가의 딜레마'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피곤한 일을, 무엇을 이루겠다고 내가 하고자 하는가..?      
그래서 포기했다. 적어도 당분간은...

기존의 '평론가'의 모습에 부합하는 역할을 맡을 이유를 스스로 찾을 수가 없다면 그 역할 자체도 '창조적인' 역할이 되도록 개발해야지... 그래서 중간 단계로 의미부여하게된 것이 이것이다. 마치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알리는 사명자처럼, 인생에서 아직 음악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음악을 전하고 눈뜨도록 돕는 사람이 되는 것... 그래서, 이래저래 평론가는 될 수 없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열매는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음악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투자한 시간과 마음과 정성과 금전이 헛되지 않게 되는 길은, 내 주변에도 그렇게 나로 인해 음악에 눈뜨는 사람들이 생기는 일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아, 어줍잖은 한 '평론가(?)'로서 그리 실패한 인생은 아니라는 위안을 가져본다.
내가 그랬던 것 이상으로 음악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해하는 아내의, 어머니의, 동생의, 그리고 몇몇 지기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 보면...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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