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ue'에 해당되는 글 26건

  1. 2010.04.30 음악 평론에 관한 단상 (v.1.2) (4)
  2. 2009.01.29 A conversation with Fr. Keating
  3. 2009.01.29 말씀 안의 생명 (2)
  4. 2009.01.05 새해를 맞으며
  5. 2008.12.18 라벤스부르크 처형장에서 발견된 기도문
  6. 2008.11.15 시편 묵상의 기쁨 (2)
  7. 2008.11.13 내면 여정에서 필요한 것들
  8. 2008.09.18 공동 생활에서 중요한 것? (4)
  9. 2008.09.17 본회퍼가 말하는 공동체 (2)
  10. 2008.08.29 에로스와 하나님 나라 (2)
  11. 2008.08.19 목표 점검 (5)
  12. 2008.08.14 상담에 관한 잘못된 생각...
2010.04.30 09:18

음악 평론에 관한 단상 (v.1.2)

음악을 사랑하는 한 애호가로서, 듣고싶은 음반을 다 구입할 수 없는 한 구매자로서, 그리고 음악이 주는 행복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픈 소박한 바램을 가진 한 이웃으로서, 이래저래 평론가들이 이야기하는 곡/연주 해설에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평론가도 천차만별이라서, 자기의 비평에 대한 나름대로의 근거를 디테일하게 대는 '실질적인' 사람에서부터, 신중하고 공정한 입장을 견지하느라 좋다는건지 나쁘다는건지 조차 알기 어려운 '모호한' 사람과, 자기 주장은 매우 강한데 왜 그런지에 대한 근거는 밝히지 않는 '권위적인' 사람에 이르기까지 천양각색의 스타일들을 만나게 된다. 

최근 한 연주회에서 감상한 말러 교향곡 2번을 다시 한번 제대로 비교 청취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것저것 음반평을 참고하다가 흥미로운 경우를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한 연주에 대한 두 곳의 평가가 다를 뿐 아니라 평론의 스타일 자체도 정반대인 경우였다. 둘 다 간편한 인터넷 서취가 가능해서 많이 알려진 웹진들이며(allmusic.com, classicstoday.com) 대상 음반은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한 루체른 페스티발 실황연주 말러 2번이었다. 

먼저, 전자의 경우 이 음반에 만점을 주었다. http://allmusic.com/cg/amg.dll?p=amg&sql=43:121660  그리고, 평론이라기 보다는 거의 찬양에 가까운 찬사를 보냈다.

"You have to listen to this disc. It justifies the whole invention of recording sound"
"... performances here are more than magnificent: they are truly and profoundly transcendent"
"One of the greatest recordings ever made in the history of sound recording"


이 연주를 못들어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흥미를 느낄만한 이야기들이긴 한데, 구체적으로 어떤 점들이 그렇게까지 - 레코딩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준으로 - 좋았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다. 백그라운드 정보와 전체적인 소감만을 최상급의 표현으로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구체적인 사항은 알 필요없이 일단 사서 들어보라는 것인지...

아뭏든 위의 글을 쓴 평론가는 아바도의 다른 말러 음반들에 대해서도 대부분 최상의 평가를 내리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가와 그(들)의 연주에 감사하고 좋아하는 일이야 나무랄 수 없는 것이겠지만, 문제는, 제대로 한번 들어보지 않고서도 어쩌면 쓸 수 있을 정도의 이야기를 하는 수준에 평론이 머무르고 말았다는 점일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같은 연주에 대한 후자의 입장은 상당한 혹평이라고 볼 수 있다.  
http://classicstoday.com/review.asp?ReviewNum=8360 

"... there's the question of what business Claudio Abbado had in approving the release of his third recording of Mahler's Second Symphony..."
"Interpretively there's nothing new here. Abbado's still far too placid in the scherzo, which flows along as if anesthetized, with unremarkable wind solos"

그러면서 여기저기 구체적인 예를 들고 있는데, 왜 그렇게 느꼈는지 알 수 있는 '근거'는 제시되고 있지만 전체를 판단하는 기준치고는 다소 지엽적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몇몇 디테일을 바탕으로 전체를 평가한 '혹평'인 셈인데, 앞의 경우처럼 디테일 없이 전체적인 소감만 제시한 '호평'과는 정반대의 입장 및 스타일을 가진 예라고 볼 수 있다.
 
이 평론가의 경우, 곡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기준을 나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독자들의 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지만, 문제는 조금 다른 곳, 즉 평론가로서 가지고있는 그의 자세에서 엿보이는 듯하다. 아바도가 지휘한 말러 3번의 경우을 예로 들어보자. http://classicstoday.com/review.asp?ReviewNum=5302 

"It's performance characteristics such as these that lead me to conclude that Abbado doesn't have a real sense of how this symphony should sound... This is music that should startle and stun; instead Abbado makes it sound boring."

그러면서 이 연주를 번스타인의 같은 곡 연주와 비교하였다. 

"considering that... DG in the meantime recorded a magnificent version of this symphony with Leonard Bernstein and the New York Philharmonic (who beat the Berliners like Lennox Lewis beat Mike Tyson), you have to wonder if there was a real need for a new Abbado Mahler Third."
"Bernstein's is bold, brazen, and sharply articulated, while Abbado's rounded sonorities sound more like a gentle reminder than an urgent summons."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번스타인의 연주가 있는데 왜 아바도의 연주가 필요하냐고?

한 가지의 해석 스타일로 모든 이의 동의를 얻어내기 어렵다는 점에서는 대개의 작품들이 마찬가지이지만, 이런 성향은 말러의 음악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다. 그의 음악이 갖는 복잡성과 규모 때문일 것이다. 번스타인이나 텐슈테트와 같은 다이내믹하고 중후장대하며 감정기복이 심한 스타일은 그 자체로 하나의 규범이지만, 길렌 또는 아바도처럼 투명하고 담백하며 디테일에 강한 어프로취 역시 오늘날엔 많은 지지자를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거의 정반대의 스펙트럼에 놓여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 이런 스타일들이 두루 인정되며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이 어쩌면 말러 음악의 묘미인지도 모른다. 

위의 평론가가 아마도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모를리는 없었을텐데... 그렇다면 왜 이런 비교를 공정한 비교인양 제시한 것일까? 이 사람은 아마도 연주의 완성도를 논하는 것과 자신이 선호하는 스타일에 부합하게 연주하는 것을 잠시 혼동하고 있었던 것일까? 

다니엘 하딩이 챔버 규모로 연주한 말러 4번 평론을 예로 들면, 소위 '평론가의 오만함'이 어디까지 나갈 수 있는지를 보게된다. http://classicstoday.com/review.asp?ReviewNum=8524

"I fell asleep twice trying to get through this sterile, benumbed performance of Mahler's Fourth Symphony, and the bottom line is that the Mahler Chamber Orchestra (at least under Daniel Harding) has no business playing it."

음악을 듣는 도중에 본인이 두 번씩이나 졸았단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본인을 졸게 만든 연주를 한 악단이므로 연주금지 또는 해산의 조치라도 취해야한다고 주장할 권리가 정말 자기에게 있다고 그는 믿은 것일까? 

이 정도의 태도라면, 음악적 진실 여부를 떠나서, 한 사람의 상식인으로서 상무식하단 소릴 들어도 할 말이 없다. 나 또한 하딩의 연주를 그리 비범한 연주로 기억하진 않는 편이지만, 그것은 그가 시도한 해석 안에서의 설득력과 완성도에 동의하지 않은 때문이었지, 그가 시도한 소규모 챔버 스타일의 해석 자체가 잘못인 때문은 아니었다. 자신이 선호하는 스타일을 가지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자신의 스타일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으로 치부하는 행위는 정당성을 얻을 수 없다. 적어도 누군가 다른 사람들의 노력의 산물인 작품/연주를 가지고서 '공적 평론'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공정성의 이슈에 대해 윤리적 책임을 가져야 한다.

이 평론가는 최근엔 다소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유로(즉, 현악군이 비브라토를 쓰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노링턴의 말러 시리즈에 대해서도 사망선고에 준하는 악평을 내린다. http://classicstoday.com/review.asp?ReviewNum=11071  

"I still hope, if only for the sake of the talented Stuttgart players, that someday they will summon up sufficient nerve to tell the management that either this tiresome quack has to go or they will... Don't they realize how foolish Norrington is making them look?"

그러나 실제로 역사를 돌이켜보면, 정말 "foolish"한 모습으로 남은 사람은 여러가지 실험을 한 음악가들이 아니라 진정성으로 말미암아 초월성을 획득했던 이들의 면모를 알아채지 못한 당대의 평론가 자신들 가운데 더 많았다. 즉, 바하의 수난곡을, 베토벤의 대푸가를, 말러의 첫 교향곡을 이해할 수 없었던 '전문가들' 자신의 자신만만한 혹평의 말들이 먼 훗날 그들을 판단하였다. 음악가는 제 1선에 선 창조자들이요, 평론가를 포함한 감상자는 제 2선에서 그들의 창조의 결과를 누리는, 이를테면, 소비자들이다. 그렇다면, '누리는 자들'은 기본적으로는 '누리도록 돕는 자들'에 대한 감사와 겸손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건설적인 비평의식이 자라나고 이해의 깊이가 더해지는 중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음악가들이 잘한 것을 감상자들이 알아보고 기꺼이 박수를 보내며 부족한 부분은 보다 발전적인 방향으로 향해가도록 건설적인 비평을 제공하는 기반환경 마련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음악예술 발전의 토양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음악가들을 길러내는 데에 대부분 집중되어 있는 사회적 자원과 에너지가 감상자들을 교육하는 데에도 좀 더 분배될 수 있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누구나 평론가가 되어야할 필요는 없지만, 누구나 평론의 결과를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평론은 때로 공동체성을 획득하기도 하고 양날의 검이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건전한 평론의 중요성은 더해지는데, 이는 음악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음악을 향한 애정어린 열정 위에 상호 존중의 자세가 더해질 때에 달성될 수 있다고 믿는다. 



ps. classicstoday.com의 David Hurwitz의 글에는 사실 부정적인 평보다는 supportive한 평론이 더 많은 편이다. 특히, 나로서는 듣도보도 못한 현대음악 작품/연주를 소개하고 지지하는 데 보여주는 그의 해박한 이해와 열정은 감탄과 도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비판적인 글 가운데서도 많은 경우는 구체적인 지적을 통해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서 볼 수 없는 시원시원한 느낌을 들게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만큼 위와 같은 경우는 오히려 소수임을 밝혀두는 것이 공정한 처사일 것이다. 이분이 보다 존중어린 자세를 가지기를 바라는 것 만큼이나 나 자신 또한 그와 같은 평론가들이 기여한 '창조물'들에 대해 동일한 존중과 감사의 마음을 유지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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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9 21:40

A conversation with Fr. Keating

"The key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은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잘 감당하고 있다는 증거는 고난과 persecution이다."

내가 만난 그는 사랑의 사람이었으며, 내가 듣는 그 또한 고난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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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9 21:34

말씀 안의 생명

말씀 안에서 생명을 잉태하는 것은 영혼을 '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것은 사랑의 책임이다.
품을 수 있는 것, 또 변화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 안에 갇혀있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    

- inspired after a conversation with the men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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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5 14:51

새해를 맞으며

새해 첫날을 맞으며 새해 resolution을 정리해 보았다.  

(why?)  loving God / loving neighbors / aligned self
(what?)  '사랑의 사람'이 되는 첫 걸음을 내딛는 데에 꼭 필요한 알아야할 것들을 배우기
(how?)  주로 인하여 / 주를 위하여 / 주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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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8 13:28

라벤스부르크 처형장에서 발견된 기도문

주님,

좋은 뜻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만 기억하지 마시고
악의를 품고 있는 사람들도 기억하소서.

하지만, 그들이 저희에게 준 고통만을 기억하지 마시고,
그 고통으로 인해 저희들이 얻게 된 열매인
저희들의 우정과 충성심, 겸손함과 용기, 관대함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을 통해 성장한
저희들 마음의 위대함도 생각하소서.

그리하여 마지막 심판 날에 저희가 맺은 이 모든 열매들이
저희에게 고통을 준 그 사람들을 위한
용서의 제물이 되게 하소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라벤스부르크에 존재했던 수용소는, 오랜 시간에 걸친
중노동, 혼잡하고 쥐가 들끓으며 난방이 없는 건물, 극소량의 식사, 잔인한 경비병,
몸이 허약하거나 말을 듣지 않는 죄수들을 처형하는 가스실이 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모두 9만 6천여 명의 어린이와 여성이 이곳에서 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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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5 02:00

시편 묵상의 기쁨

세상살이에도 즐거움은 있다. 
그러나 이는 마치 조그마한 무언가가 바쁘게 up & down하며 왔다갔다하다가 이내 사그라드는 것과 같은, 말하자면 '촐싹거리는' 즐거움이다. 

그러나 묵상이 있는 곳에 찾아드는 기쁨은 때로 가랑비처럼, 때로 거대한 파도처럼 '조용하게 그러나 탱크처럼' 밀고 들어온다. 마음을 찌르는 참회나 아픔도 터져나오는 자유함과 병행된다. 세미하여도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시편 묵상이 특히 그런 기쁨을 안겨준다. 

세상 즐거움은 즉각적이고 종종 강렬하며 예측이 가능하다. 
그에 반해, 묵상의 즐거움은 노력과 기다림이 필요하고 예측이 어려운 측면이 많다. 
그래서 '뚝배기 진국'같은 묵상의 즐거움보다는 '설탕물'같은 세상 즐거움으로 기울기 쉬운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목마르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아직 참맛을 모르거나 쉽게 잊는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이 영역에서만큼은 참맛을 추구하며 '입맛 까다롭게' 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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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3 01:57

내면 여정에서 필요한 것들

내면 여정의 각 단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analogy로, 석유 시추 과정에의 비유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처음에 땅을 파내려가는 과정은 일반적인 땅파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내면 여정의 도입부 역시, 평상시에 과거를 돌아보며 여러가지를 떠올리고 의미를 부여하곤 하던 일과 비교할 때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면 단단한 암반을 만나게 되는데, 곧 아픔과 상실, 실패와 좌절, 배신과 외로움, 욕망 등의 '어두운' 자극으로부터 말미암는 내면의 두려움, 수치감, 또는 분노와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유전이 암반 속에 보관되지 않았더라면 존재할 수 없었던 것 만큼이나 이 과정 또한 필연적일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인생의 각 플롯은 평화, 성취, 기쁨 등의 '밝은' 순간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이 평화를 흔드는 자극과 그로 말미암는 갈등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만큼, 이 숨겨진 '어두움'의 면모를 아는 것은 본질에 접근하는 데에 꼭 필요한 일이 된다. 

 --> 1. 이 과정을 통과하는 데 필요한 것은 자신의 아픔 또는 어두움과 대면할 수 있는 '용기'이다.
 
그러나, 암반을 뚫는 과정은 그리 일사천리로 이루어지지만은 않는다. 생소함에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지루함이나 회의감이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인생의 각 플롯들이 우선 자리매김되면 서로 컨텍스트를 형성할 수 있게 되고, 인생의 전문맥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나의 삶에 특정한 방향성을 부여하신 그분의 의도 또한 발견하기가 쉬워진다. 그분의 의도는 부르심의 소명과 관련이 되며, 이는 다시 오늘을 살아내야할 방향성을 분별하고 거기에 align하게 하는 집중력을 준다. 그러므로, 플롯을 구성하는 열쇠 역할을 하는 감정상의 단초들을 발견하는 일은 이 모든 과정의 기본이 된다. 여러 플롯들을 중심으로 '전문맥'을 파악하는 것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인생의 경우 '후문맥'을 알 수는 없는 반면 전자를 살펴볼 수 있는 데이타는 이미 무궁무진하게 주어져있기 때문이다.  

 --> 2. 이 과정을 지속하게 하는 힘은 이 뒤에 값진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소망'이다. 이 소망은 큰 계획을
        가 지고서 일관되게 나의 삶을 이끌어오신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온다.  

암반이 뚫리면 첫 번째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유용한 석유가 아니라 강한 압력으로 분출되는 가스와 쓸모없는 불순물들이다. 때로는 그 강한 압박과 독성으로 인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그래서 처음 유전을 뚫으면 대개 한동안은 불을 피워놓는다. 어느 정도 태워올리고 난 후에야 비로소 유용한 천연가스와 원유를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 3.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태워올리는' 내적 메카니즘이 요구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분께 모든 것을
        올려드리는 '기도'이지만, 그 구체적인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것 같다. 내면 향하기에 도움을 주는 
        특정한 형태의 기도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 자연스레 찾아진 방법은, 시편을 깊이 묵상
        하는 기도였다.       
 
어느 정도 안개가 걷히고 나면 플롯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플롯을 조합하고 배치하고 하다보면, 마치 성경 본문의 단락을 나누고 제목을 붙여서 나열할 때 본문의 구조가 떠오르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는 어느 정도 의도된 프로세스가 필요하다. 마치 채굴된 원유를 바로 쓸 수 없기 때문에 정유 공장에서 정제하는 프로세스를 거쳐야하는 것과도 같다. 원유 정제는 여러 분야의 지식과 규모가 요구되는 종합 학문/산업이다. 

--> 4. 이제 필요한 것은, 인생을 해석('프로세스')하는 데 유용한 '방법론'이다.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성경 말씀의 내러티브를 묵상하면서 숲-->나무로 관찰하고 나무-->숲으로 해석하는 훈련을 해온
       것이며, 다른 하나는, 마음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동체 안에서 관찰과 해석의 확장을 
       이루는 일이다.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저 미지의 세계를 찾아나서는 것 같은 느낌만 갖고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분의 의도하심 안에 있는 참다운 나의 모습을 찾아가고, 그것을 도구로 다른이의 인생의 의미가 그분 안에서 온전히 찾아지는 일을 또한 돕게될 이 과정이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분'이 계시고 '다른이들'이 있기에 온전한 의미를 갖게되는 이 여정의 다음 chapter들을 기대해본다.    


참고) 알렌더,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
        Peace, "Spiritual journaling"
        그리고, 멘토 및 공동체 식구들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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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8 01:33

공동 생활에서 중요한 것?

공동 생활을 잘하기 위한 핵심은 어떤 점들일까?

우선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가 떠오른다. 
1. 상대방이 잘되는 것을 우선하고 서로를 위해 기꺼이 양보하는 사랑과 섬김의 마음가짐  
2. 신뢰를 바탕으로한 솔직하고 열린 의사소통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들어주고 받아주는 일

그런 점들에서 최고의 동반자들인 그들로 인하여 감사하고 그들을 허락하신 그분께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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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7 03:49

본회퍼가 말하는 공동체

“The physical presence of other Christians is a source of incomparable joy and strength to the believer... The believer feels no shame, when he yearns for the physical presence of other Christians.”

“Christianity means community
through Jesus Christ and in Jesus Christ. No Christian community is more or less than this… We belong to one another only through and in Jesus Christ.

- from Life Togther


 

Human community
Spiritual community
자기 자신을 위한 동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동기
욕망에 근거를
진리에 근거를
계산적이고 agenda있는 섬김
단순하고 겸손한 섬김
형제자매를 자신에게 복종시킴
형제자매에게 겸손히 복종함
상대의 이미지를 스스로 만듦
그분에게 받은 그분의 이미지로 인식
말씀+사람의 영향력이 결속케
말씀이 결속케 (주께로)
Immediate relationship
No immediate relationship
필요한 놓아주지 못함
자유함
유익관계의 상실시에 중단됨
유익을 넘어선 지속
Human absorption
그리스도의 소유일 자유 인정
원수를 사랑할 없음
원수를 사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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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의 명저 "Life Together"에 나와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참다운 '영적 공동체'와 '인간적 공동체'에 관한 비교이다. 본회퍼는 당시 나치 치하에서 독일교회가 변질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핍박 상황 아래에서 복음의 가치를 지키고자 고백교회 신학교 공동체와 함께하면서 이 책의 묵상들을 하게 된다.  
 
참된 '영적' 공동체성이 상실되어가면 공동체의 모습에 변질이 일어나는데, 일례로 리더 자신의 '사역적 커리어'라는 욕망이나 어떤 특정한 결과들을 염두에 둔 계산적 아젠다가 말씀이 제시하는 바와 공존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음을 그는 경고하고 있다. 즉, 말씀의 영향력과 사람의 영향력이 공존하는 형태가 되어, 사람의 영향력만 있는 경우에 비해서도 오히려 덜 위험하지 않은 상황을 만들게 된다. 그 결과로, 구성원들은 사람의 아젠다와 목적에 복종하게 되고, 사람들의 이미지는 그리스도의 이미지의 반영이기 보다는 그러한 아젠다의 도구로서 삼아지게 된다. 이런 경우, '조직'은 필요한 자를 놓아주기 어려우며, 거꾸로 더이상 도움이 되지않는 사람과 함께할 수도 없게 된다. 또한, '조직'의 유지를 위해 리더 개인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활용하는 모습과 인간적인 매력을 (세상적인 측면으로서의) 강화하고 호소하는 'human absortion'이 기능하게 된다. 이 모든 결과로 공동체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는 공동체가 된다...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당시 나치 치하에서의 상황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본질적 의미에서도 다르다고 결코 안심할 수만은 없는 모습들을 오늘날 조국의 교회와 주변의 공동체들로부터 그리 드물지만은 않게 볼 수 있는 이유 때문이다. 사실 더 무서운 것은, 성령의 다스리심에 충분히 굴복하지 않고 있을 때에는 내 안에서조차 그러한 어두운 면모가 언제든지 튀어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일이다. 당시 일차적으로 히틀러를 두고 했던 본회퍼의 이야기들은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기억되어야할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자신이 가진 권위의 근거와 권한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은 리더는 잘못된 리더(misleader) 되기 쉽다. 사람들은 자기가 따르는 지도자를 우상화하고자 하는 바램을 가지게 되는데, 이에 스스로 굴복할 리더는 하나님을 모방하는 자의 자리에 앉게 되며,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해악을 끼치는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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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9 03:00

에로스와 하나님 나라

김세윤 교수는 '세상'을 움직이는 근본 메카니즘을 '에로스적 사랑'이라고 규정한다. 이를 잘 이해하는 것은 사역자로서의 삶의 의미를 새로이 해보려는 현 시점의 여러 측면들에 관해서도 많은 것을 시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빌립보서 강해'(빌 2;6-1)에 귀기울여보자.

"에로스(eors)는 가치에의 끌림(attraction to value)을 뜻합니다. 에로스의 행동방식은 주체가 가치를 가진 객체에게 끌려가서 그 객체를 주체에게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좋은 가치들을 취하여 자기의 자원을 늘려야 인간은 행복을 느낍니다. 인간이 지식을 '사랑(에로스)'하는 것은 지식을 취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권력이나 돈을 '사랑(에로스)'하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에로스는 인간성의 본질이거니와 문명의 동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것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오늘날 에로스를 성적 끌림에만 좁게 적용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사실 인간 실존의 기본적인 동력입니다."

좀 더 확장해서 말하면, '필요와 유익'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획득하거나 누군가를 동원하려 했다면 그것은 '에로스'적인 접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그 필요와 유익 자체는 매우 선한 것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일'을 이루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론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을 이루는 방식에 있어서만은 아직 여전히 에로스적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에로스적 동기부여와 접근은 어떤 부작용을 낳는가?

"문제는 이 에로스가 항상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에로스적 실존은 만인이 만인에게 자기를 주장하게 하여 처절한 생존경쟁 상태를 낳습니다. 17세기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의 표현대로 말한다면, 그것은 만인이 만인에게 늑대가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에로스적 실존은 인간의 삶을 확대하는 것 같지만 역설적으로 죽음을 확대합니다. 인간이 피조물로서 자신의 부족한 내재 자원에만 의존해서 사는한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나'만을 확대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발로였다면 그것이 갈등과 생존경쟁의 상태로 몰아갈 것이라는 점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 즉 사역을 함에 있어서 '에로스'적 정신으로 하게될 때에는 어떤 부작용이 있을까? 비록 세상의 생존경쟁적 갈등과 같은 양상으로까지 가지는 않는다 할지라도(각 구성원들이 그렇게 되지않도록 믿음 안에서 스스로 절제하고 인내할 것이므로), 존재적(ontological) 합일의 공동체성 없이 단순히 필요를 채우는 'helper'로서 돕거나 돕게하는 일은 각 사람의 진정한 '사명적 삶'과의 충돌이라는 형태의 내적 소모와 한계로서의 갈등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에 대한 복음적인 대안은 무엇인가?
 
"인간성의 특징은 결핍인 반면, 신성의 특징은 초월적 충만함입니다. 신성의 본질은 자신의 충만함에서 내어줌에 있습니다. 곧 아가페(agape: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나'를 내어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그렇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본을 보이신 길이기도 하다. 이 수준과 나의 현수준이 비교되기 시작할 때, 그 격차를 보면서, 또 그 격차를 줄일 수 있는 능력이 내 안에 없음을 보며 절망하기 시작한다. 이 '세상'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거룩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지만, 그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 실현되는 데에 한 부분이 되고자 행하고 마음먹는 일에는 다시 무력하게 '세상'의 논리를 끌어들이는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삶을 돌아보는 가운데 흥미롭게 관찰되곤 하는 사실 한 가지는, counter-intuitive하게도 대개 '약함의 장애'보다는 '강함의 장애'가 더 크다는 점이다. 즉, 세상 방식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힘과 지식과 권한이 내게 있을 때에는 대개 무력하게 '세상'의 논리를 따르게 되기가 쉽다. 거꾸로, 각종 연약함 - 육신의 가시가 있거나, 대단한 가문이 아니고, 대단한 학벌도 없으며, 소위 능력있는 사람도 아니고, 남들이 대단하다 칭송할만한 skill도 부족하고, 자신의 모습보다 120% 부풀려 말할 수 있는 '말빨'조차 없는 -  이 점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까지는, 비록 이론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동의할지라도 실제의 삶에 부딛히면서 나타나는 본능적인  반응은 그 기본적인 필요성조차 인정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아마도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동일하게 "회개하라"는 말로 '하나님 나라'의 첫 케리그마를 제시하며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 아닐까?

사역함에 있어, 일함에 있어, 만남에 있어, 살아감에 있어 얼만큼 '내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가' 하는 질문 위에 올려진 이 자가점검의 시험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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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9 03:38

목표 점검

주안에서 그들이 영적으로 잘되고, 삶이 통합되며, 생명에 기인한 참다운 행복을 누리는 일을
나의 일차적인 목표로 삼을 수 있겠는가?
 
이를 위해 그 누구의 인정함과도 무관하게 기꺼이 준비하고 댓가를 지불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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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4 01:53

상담에 관한 잘못된 생각...

줄 수 있는 답을 다 주는 것.
정답을 지금 주는 것.
내가 답을 주는 것.
답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

- inspired after a conversation with the men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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