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0.04.27 포스트모더니즘 세대에게 다가가기 (4)
  2. 2009.07.31 기도
  3. 2009.02.25 싸움의 달인에게 배운다 (2)
  4. 2009.02.20 그들의 영이 안다! (2)
2010.04.27 01:09

포스트모더니즘 세대에게 다가가기

'요즘 이십대 청년들에겐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가?' 

이들을 이해하고 이들의 언어로 다가가는 이슈를 놓고 실제 상황에서 부딪힐 때마다 한계성과 당혹감을 더해오던 
차에, 나름 많은 고민과 연구를 해온 흔적을 담아 보내준 한 후배의 조언이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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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몇 가지 관찰한 것을 나누겠습니다. 꼭 포스트모던 세대라기 보다는 
젊은 세대들 보고 관찰한 것입니다.  
 
1. 재미있어야 합니다.

이 부분이 저도 참 약하기도 하고, 이게 왜 중요하냐고 반문할 여지도 많은데,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재미없으면 관심 안 갖습니다.
 
2. personal한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이 필요합니다.

facebook, twitter, blog 등 불특정 다수에게 자기의 삶을 오픈하는 경우가 많고, 공동체에 소속되려는 열망이 
강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진심을 나누는 정도로 나아가기는 그리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자기를 드러내되 
피상적으로 드러내는 거죠. 관심 갖고 micro-blog 혹은 blog하는 것을 보시면서, 대화의 창구를 마련해 가시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3. 가식적인 것을 피해야 합니다.

이건 전에도 이야기 나눴던 부분이긴 한데요. 그 후에 읽은 article 중에 유명하고 도덕적인 사람들의 실패를 
미디어에서 보고 자랐다는 점이 요즘 포스트모던 세대의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라는 점을 언급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포장하고 그러는 것보다 까발리는 것을 좋아하는 모습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치명적인 정도까지 
가지 않는다면 드러나는 약점을 통해서 오히려 공감을 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MBC 황금어장이 그런 점을 
이용한 대표적인 프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구요. 절대선과 절대악의 개념이 사라지고, 인간 안에 선과 악이 공존
하고 있으며, 그 경계가 모호함을 나타내는 영화 (이를테면 Bourne 시리즈) 가 공감을 얻는 것도 근본적으로 같은 
현상이라고 저는 분석하고 있습니다.
 
4. 본인과 relevant해야 합니다.

꼭 개인적인 이슈가 아니더라도 성경의 말씀과 자기 삶에 click되는 포인트가 없으면, 일반원리로서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narrative로 공부하는 것이 많이 도움이 될 수 있는 것 같구요. 지난 번 
pre-gp 때도 이걸 많이 느낄 수 있었는데, 강의보다는 q&a 때 집중도가 훨씬 높았습니다. 자기 질문 혹은 공감되는 
다른 사람의 질문에 대답을 듣고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또다른 예로는 homosexuality 이런 걸 성경적으로 
어떻게 볼지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면 아마 다들 쫑긋하고 참여할 겁니다. 사회적인 관심사이자 해답을 얻지 못한 
부분일테니 아주 relevant하겠지요. 사실 말이 쉽지, 실제로는 참 어려운 부분이긴 하지요.
 
저 같은 경우는 그래서 성경공부 교재 만들 때에 1번 질문을 말씀이 아닌 삶과 연관지을 수 있는 (가능한 재미있는)
introduction 질문을 주로 넣곤 합니다. 그래서 공부가 끝났을 때에는 시작할 때 자기가 했던 대답을 떠올릴 수 
있게 하려고 하죠.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lesson을 주려고 하는 것보다는 좀 위험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open-ended 결론으로 끝나고 가는 것도 때때로 고려해 볼만한 approach가 아닌가 싶습니다.
 
5. 책은 잘 안 읽는다고 가정해야 합니다.

멀티미디어 + 인터넷의 영향이겠지요. 예전 같으면 보이지 않던 먼 것도 이제는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활자보다는 자기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영상에 훨씬 더 큰 credibility를 두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많은 교회
에서 광고 등으로 영상을 쓰는 걸 넘어서서 설교 중에도 영화의 한 장면을 따온다든지 하는 접근을 많이 쓰지요. 
시간 되실 때마다 영화 보시면서, 성경과 관련지을 수 있는 narrative를 찾으시는 것도 좋을 듯 해요. 
꼭 영화 뿐만이 아니라 음악, 미술 등도 가능하겠지요.
 
여담이지만, 그만큼 일부 소수를 제외하면 대다수는 미디어 자체의 credibility는 덜 신경쓰는 것 같습니다. 
즉 존 스토트가 이렇게 말했다, 뭐 이런 식으로 얘기해도 소수를 제외하면 그게 중요하다는 것도 잘 모를 수 있다는 
거죠. 오히려 반대로 삶이 click되는 이야기를 책을 인용함으로써 나눌 수 있다면, 그 후에 저자를 알려주며 책을 
읽도록 유도하는 게 더 effective한 것 같습니다.
 
 ...
 

(정리: 김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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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31 09:14

기도


이 일들에 임하기 전에 
먼저 내면 깊은 곳에서 당신의 얼굴을 뵈오며, 
당신과 만난 바로 그곳에서
그들을 품을 자리를 넉넉히 마련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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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5 19:30

싸움의 달인에게 배운다

무도계의 전설로 알려진 최배달씨가 아마도 미야모도 무사시의 이야기를 언급할 때 한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사시에게는 열 명을 상대하는 일이나 백 명을 상대하는 일이나 똑같았다. 그는 어느 경우이건 매 순간 전후좌우 네 명씩하고만 상대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친절하게 리마인드 해준다. 한걸음 더 나아가 "나는 한놈만 패"라고 말한 어떤 영화 속 등장인물도 있었노라고.. ^^)

영화 속에는 한꺼번에 수십 명을 두루두루 담당하며 무찌르는 super hero들이 등장하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픽사나 할리우드의 세계일 뿐이다. 너무 많은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그 누구도 상대하고 있지 않은 것과 동일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거대담론을 이야기하는 것에는 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나무' 없이 늘 '숲'만을 이야기하곤 한다면, 그것은 아직 그 숲에 직접 가본 적은 없다는 반증에 다름아닐 수도 있다.   

내가 속한 공동체, 지역교회, 또 지역사회가 변화되는 것에 관해 무슨 일부터 해야할런지 참 고민되고 막막하게 느껴지는 지금이야말로 그런 면에서 거대담론으로 흘러버리기가 참 쉬운 때인 것 같다. 이런 때에 엉뚱하게도 '싸움의 달인' 이야기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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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0 18:30

그들의 영이 안다!

다른 이와 만나고 말씀을 나누며 삶을 나누는 현장에 설 때마다 문득문득 '무서운' 느낌이 드는 순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의 영이 안다'는 생각이 리마인드될 때이다. 
 
일례로, 코스타와 같은 모임이 끝나고 나면 수많은 참석자들로부터 자신 또는 그 주변 누군가의 인생이 어떻게 영향을 받았고 터취되었는지에 관해 직간접적인 고백을 수없이 듣게 되는데,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은, 그러한 일의 통로가 되어주었던 누군가의 이름은 많은 경우 소수의 특정 이름들이 계속 반복되어 거론되곤 한다는 점이다. (물론 소수에게 정성껏 진실하게 집중하였으나 끝내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진 이야기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비록 그런 이야기를 전하는 참석자들 자신은 나이가 어리거나 신앙적으로 초보 단계에 머물러있을 수 있다. 아직 그들의 세계관이나 인격이 많이 변화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하나님과 깊이있게 교제하는 법에 대해 미처 눈뜨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때로는 잘못된 것들에 마음이 기울고 환호를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존적이고 존재적인 인생의 목마름 앞에 진솔하게 서있을 때에만은, 무엇이 진짜인지, 또 누가 진짜인지를 그들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들의 이성과 분별력으로 판단하고 표현할 수 없을 때조차도 그들의 '영'은 알고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그 표현할 수 없는 '생명력'에 관해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있는 것이다.  

멘토에게 물었다. "사역자로서의 삶을 잘 살아내는 데에 꼭 필요한 덕목은 무엇입니까?" 그가 주신 대답은 예상치 못한, 그러나 매우 인사이트풀한 것이었다. "그것은 장인정신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자가 하나님과 더불어 말하려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려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더라도 하나님과 함께하려하지 않는다. 아주 멀리까지 잘못나간 경우엔, 하나님을 위하여 시작했던 일이 자기 자신의 영적 커리어 관리로 전락하게 되기도 한다. 하나님이 도구화 되어가는 삶으로부터 큰 생명력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긴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의 시선이 기준이 되기보다는 사람들의 시선이 기준이 되어 거기에 자신을 맞추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삶의 모습은 '피상성'이다. 만남과 예배와 교회 모임과 각양 활동, 헌신 및 사역들이 '외형적'으로 넘쳐나지만 정작 그 '안에' 삶을 변화케하는 생명의 힘이 깃들지는 못하는 것이다. 결코 시작할 때의 의도가 악하거나 잘못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론 딱히 하나님 편에 서있다고 보기도 어려운 어정쩡한 삶의 모습. 그것이 피상적인 삶의 아픈 모습이며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가 '목마름의 시대'라고 불리워질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의 하나는, 이 시대가 그 어떤 시대 못지않은 '피상성의 시대'인 이유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시장에서 충분히 팔릴만한 백 개의 도자기를 구워놓고도 장인으로서의 양심과 자신에게 정직한 기준 때문에 95개나 손수 깨버리는 '장인정신'이 피상성을 극복하는 하나의 키워드로 삼아질 만할 것이다.  

그럼 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방향성에 관한 이야기는 도대체 누구로부터 들을 수 있는 것인가? 이제 각자가 그런 인사이트를 알려줄 선생과 멘토를 찾아나서야만 하는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런 류의 가르침은 대개 약한 자가, 낮은 자가, 가난한 자가, 어린 자가, 배우는 자가, 피인도자가 강한자에게, 높은 자에게, 부유한 자에게, 나이든 자에게, 선생에게, 지도자에게 훨씬 잘, 그리고 자주 가르쳐주는 일들인 것같아 보인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나아가 귀기울이고 그들로부터 배워야만 할 것이다. 이런 컨텍스트에서라면 세상의 눈으로 보는 이른바 '베풂'은 더이상 내가 '가진' 무언가로 그들을 '돕는' 것이 아니다. 가장 귀한 것들을 '가르쳐주는' 그들에게 은혜갚는 마음으로 하는 '섬김'이 된다. 
   
지금 조국의 백성들은 고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 앞에서, 이 땅의 종교인들에게, 리더들에게, 또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들이 가진 목마름은 어떤 것인지, 그들은 어떤 사람을 기다리는지에 관해 조용히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그들이 무언으로 전하는 이 큰 울림의 메세지를 진지하게, 겸허하게, 아프게, 그러나 소망 가운데 오늘 귀기울이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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