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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5.06 [이코스타 기고] 헨리 나우웬의 “아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읽으며... (8/2004)
  2. 2008.05.06 [이코스타 기고] 노자(老子)가 말하는 ‘성경적인’ 리더상(像) (2/2004)
  3. 2008.05.06 독서토론: 찰스 셸던, "In His steps" (BKPC, 2003)
  4. 2008.05.06 독서토론: E. Peterson의 "Leap over a wall" (BKPC, 2002)
  5. 2008.05.06 독서토론: C.S. Lewis의 "고통의 문제" (BKPC, 2002)
2008.05.06 18:45

[이코스타 기고] 헨리 나우웬의 “아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읽으며... (8/2004)

동양 속담 중에 이외의 모든 사람은 나의 스승이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은 본받을 만한 모델로서, 어떤 사람은 본받지 말아야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 나름대로 배울 만한 점들을 제공한다는 의미로 말이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면, “모든 사람으로부터 최소한 가지씩의 장점을 발견할 아는눈을 가지도록 하는 권유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살아가면서 인격적으로, 또는 등을 통하여 직간접적으로 만나게 되는 만남이 믿는 이들에게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사람들에게서 부분적으로만 드러났던 하나님의 형상 만남과 나눔들 가운데서 더욱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헨리 나우웬(Henry Nouwen) 간접적으로만나는 만남도 우리의 묵상과 깨달음에 풍성함을 더하여 주는 좋은 예인데, 다른 사람들의 삶을 통하여 주님을 만나는 일에 탁월하였던 그를 통하여 우리 역시 주님을 만나기를 소망한다.

 

헨리 나우웬의 삶은 사역적인 면에서 크게 시기로 나눌 있다.  예일대에서 신학적 심리학을 가르쳤던 70 년대, 하버드에서의 파트타임 강의와 남미 선교를 병행하였던 80 년대, 그리고 캐나다의 라르쉬 공동체 데이브레이크에 들어가서 장애인들, 특별히 아담이라고 하는 중증 장애인과 함께 남은 생애를 보낸 90년대가 그것이다.  그가 유명 작가와 일류 대학의 교수라는 영향력을 뒤로 하고 (사실은 그의 모든 존재를 집약해서!) 영혼을 섬기는 삶을 사는 데에 생의 마지막 10년을 보낸 사실은 알려진 대로이므로, 그런 면에서 아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라는 책에는 그의 인생의 무게가 실려있다고 말할 있다.   

 

아담과의 만남

 

아담 아네트(Adam Arnett) 1996 2월에 34 년의 생을 마감하였으며, 헨리 나우웬도 책을 쓰고 직후인 같은 9 , 마치 자신도 일을 하였다는 아담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아담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과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자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관에 누워있는 아담의 시신을 순간부터, 그의 삶과 죽음의 신비에 사로잡혔다. 그때 섬광처럼 가슴에 와닿은 사실은, 바로 장애인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독특한 사명을 띄고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 그리고 이제 사명을 완수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그런 시선으로만 아담을 보았던 것은 아닌 같다.  그를 아끼던 많은 친구들은, 많은 사람들을 위한 도움, 체계적인 인도함, 섬김의 기회들을 마다하고 이런 곳에 있는 그를 이해할 없었다.

 

““헨리, 자네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데가 여기인가?” 그는 혼란스러워했을 뿐만 아니라 화를 내고 있었다. “아담에게 자네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던 대학을 떠났단 말인가?”...”

 

생각의 변화

 

사명감과 의욕으로 시작하였던 새로운 섬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과 방황과 영적 침체의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오게 된다.  그러던 그의 마음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어 갔다.    

 

“... , 달이 지나면서 나는 아담과 함께하는 한두 시간을 사모하게 되었다... 형세가 역전되고 있었다. 아담은 나의 선생이 되어가고 있었고, 삶의 광야를 혼란 가운데 헤메고 있는 나와 함께 걷고 있었으며, 나를 이끌어주었다. 아니,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와 함께있는 동안 나는 그를 돌보는 모든 활동을 넘어, 내면에서 들려오는 사랑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간은 순수한 선물이요, 묵상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어떤 부분과 만나고 있었다. 아담과 함께 나는 거룩한 존재의 현존을 알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

 

모두의 눈에 선생이었고 돕는 였던 그가, 실제로 주님 안에서 배우고 도움을 받은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의 섬김과 양육의 대상이 되어주므로써, 그러한 일들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하였을 배움과 자라남을 가능케 했던 아담이야말로, 자신을 위하여 세워주신 영적 스승이요 영적 은인이었다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아담을 통하여 만나는 예수님, 그를 통하여 만나는 우리 자신

 

“...예수님은 권세와 힘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연약함의 옷을 입고 오셨다. 나는 아담이 2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예수님의 연약함 때문에 아담의 극도로 연약한 삶을 최고의 영적 의미가 있는 삶으로 바라볼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담에게는 내면의 공간을 채우려는, 마음의 산란함이나 집착 그리고 야망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을 위해 마음을 비우는 영적 훈련을 필요가 없었다. 소위 그의 장애 그에게 이러한 선물을 것이다... 대부분은 아담을 불구자로 보았다. 우리에게 것이 거의 없고, 가족과 공동체와 사회에 짐만 되는 사람으로 말이다. 그가 그런 식으로 여겨지는 , 그의 진리는 숨겨진 채로 있을 것이다...” 

 

헨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아담의 참된 가치를 보았으며, 아담을 통하여 세상이라는 거품을 걷어낸 예수님의 모습을 그의 마음에 되새길 있었다.  내게 다가오는 예수님의 이미지는 정직한 의미에서 어떤 모습일까?  나는 내가 보기 원하는 주님의 모습만 보고 있으면서도 그런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눈을 덮고있는 비늘 벗겨주기 위하여 때때로 삶의 한복판으로 찾아오는 장애 고난 의미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그들은 그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자로, 철저한 연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가 되도록 하기 위해 보내신 자로 환영했다. 그를 이렇게 바라보면 근본적으로 모든 것이 바뀐다. 그때부터 아담은 특별하고, 경이롭고, 타고난 재능이 있는 약속의 사람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의 경이로운 존재 자체와 믿어지지 않는 가치는 우리에게, 우리도 그처럼 하나님께 귀히 여김을 받고 은혜를 입었으며 사랑받는 자녀임 자신을 부자라고 생각하건 가난하다고 생각하건, 지성인으로 보든 불구자로 보든, 잘생겼다고 생각하든 매력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든 상관없이 이해할 있도록 안내해줄 것이다...”

 

우리는 존귀한 존재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존재 자체를 그토록 귀히 여겨주시며 사랑하고 계시는 가지의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을 너무도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그렇기에, 나의 수고와 지식, 성취에 기대어 존귀함을 획득하고자 애쓰기도 하고, 같은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네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네가 진실로 아느냐? 네가 이토록 귀하기 때문에 값으로 인하여 네가 죽는 보다는 내가 대신 죽는 편이 낫겠다고 여긴 것이란다...”  

 

존재 관하여...

 

“...인생은 선물이다. 우리 사람은 독특하며, 우리 이름이 아신 되었으며, 우리를 만드신 그분의 사랑을 받는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오는 너무 크고 끈질기며 강력한 메세지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가진 그리고 성취할 있는 것으로 사랑받는 존재임을 증명해야 한다고 믿도록 한다. 우리는 이생에서 무언가 해내는 몰두해 있으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 우리의 기원과 종말에 대한 진리를 이해하는 너무나 느리다...  그들은 아담의 장애만을 보게 하는 시험을 이겨냈다. 그들은 그가 돌을 떡으로 바꾸거나, 높은 탑에서 안전하게 뛰어내리거나, 부를 획득할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받아들였다. 아담은 이런 세상적인 일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그가 사랑받는 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로서만은 귀히 여겨질 없다는 생각에 불안하고 두려워질 때가 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심지어는 가정에서조차, 우리가 귀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무엇 때문에라고 말할 있는 이유들이 필요하다.  용모가 아름답거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열심히 하고 있으며 좋은 결과를 내고 있기 때문에, 학벌이나 지위가 주는 신분적인 잇점들 때문에...  믿는 이들의 모임은 대개 이런 점들에서 다소나마 위로와 소망을 주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서도 이보다 낫다고 자신할 있을까?  출석과 봉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책임과 섬김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좋기 때문에, 말씀이 좋기 때문에 귀할 , 그러한 이유들을 상실할 때에는 더이상 귀중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면 말이다.  사람 사람이 존재 하나만으로도 귀중히 여김을 받을 수는 없는걸까?  잘못했던 일까지 칭찬하고 내버려둘 수는 없겠지만, 어느 경우에도 존재 자체만은 남겨져서 최소한 계속 더불어 살아갈 수는 없는걸까?  모든 수고와 섬김과 업적들은, 이미 귀중한 존재 위에 더하여진 감사 제목일 수는 없는걸까?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오히려 자신이야말로 그러한 세상과 공동체와 만남을 만들어가고 있는 당사자라는 점일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평가받고 때로는 버려지기도 하는 우리가 동시에 우리의 옆사람들을 평가하고 때로는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밀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기 때문에... 너희는 그저 '' 것은 '' 하고 '아니오' 것은 '아니오' 라고만 하여라.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 5:37)”

 

사역 관하여...

 

아담이 기도를 있었을까? 하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의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있었을까?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이해했을까?” 나는 오랫동안 이런 질문들에 대해 생각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얼마나 아담이 있는지 그리고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바를 얼마나 아담이 이해할 있는지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이 아래로부터 오는질문들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나의 걱정과 불안이 반영된 질문이었다. 하나님의 질문, 위로부터 오는질문들은 아담이 너를 기도로 이끌도록 맡길 있느냐? 너는 내가 아담과 깊은 교제 가운데 있다는 사실과 그의 삶이 기도라는 사실을 믿을 있느냐? 아담이 너의 식탁에서 살아있는 기도가 되도록 있느냐? 너는 아담의 얼굴에서 얼굴을 있느냐?” 였다...”

 

너는 그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을 있느냐?”  사역하느라 정신이 없고 씌임받느라 지금 분주한 나에게, 주님께서 옆의 사람 사람을 가리키시면서 이렇게 물으신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대답하게 될까... 

 

“...나는 내가 일과 얼마나 많이 이루어낼 있을지에 대해 염려하는 동안, 아담은 내게 행위보다는 존재가 중요합니다라고 선포하고 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어떤 말을 하는지에 몰두해 있을 , 아담은 내게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의 칭찬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중요합니다내가 나의 개인적인 성취에 관심을 쏟고 있었을 , 아담은 내게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나를 일깨워주었다. 그는 바로 자체로, 내가 접한 인생의 진리를 가장 철저하게 증거해 주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 16:15)” 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언을 하고” (설교, 말씀 선포, 성경공부 인도를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주를 영접시키거나 내적 상처를 치유하고) “권능을 행하여도” (살리고 변화시켜도)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수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 7:21-23).  중요한 것은,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가고, 일을 통하여 나의 존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닮아가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은 결코 선하고 의로운 자체를 위하여 쫓아다니지 않으셨으며, 다만 하나님께서 지금 순간 명하시는 일들을 헤아려 순종하셨다 ( 1:35-39).  바쁜 사역의 가운데에서도 종종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 하나님과 대화하고 그분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시간을 가지셨기에, 하나님의 안에서, 허락하신 이들과 더불어 지내며 행하시는 삶이 가능하셨다.  많은 책임과 의무와 기회와 성취가 있는 삶의 한복판에 우리 또한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묵상하고 따르기를 중단하지 않고 있는지...

 

강함 약함

 

“...그렇다. 그들은 말을 없었지만 나는 너무 많은 말을 했다. 그렇다. 그들은 걸을 없었지만 나는 인생이 비상사태의 연속인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렇다. 그들은 일과 중에 도움을 필요로 했지만 역시 줄곧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하고 외쳤다. 나의 정서적인 필요, 기도할 없는 모습, 성급함, 불안함, 수많은 근심과 두려움에 직면했을 , ‘장애라는 단어가 전체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나는 아주 불안정하고 궁핍하고 연약한 인간, 바로 자신을 만났다. 이제 나는 자신의 장애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아담처럼 되는 저항하고 있었다. 나는 의존적이거나 나약한 사람이 되기는 싫었다. 그렇게 궁핍한 사람이 되고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디에선가 아담의 , 철저한 연약함의 길은 예수님의 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성경 말씀을 조금씩 깨달아오는 동안, 나는 오히려 믿음의 분량을 충분한 것으로 여기고 나의 깨달음의 수준에 만족스러워하면서 영적으로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는지...  이미 거둔 작은 업적에 쉽게 자랑스러워 하면서도 매일매일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도전들 앞에서는 오히려 나약하기 일쑤이지 않았는지...  자신에게는 끝없이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끝없이 엄격한 이중적인 잣대에 그만 익숙해져 버려서 더이상 아무런 문제의식조차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강함과 성숙함을 드러내야만 정도로 아직 연약하고 미숙한 것은 아닌지...  너무 바빠서 기도할 없고, 하나님의 이끄심을 기다리기에는 너무나도 성급하며, 제자의 삶을 살기에는 아직도 몸에 지녀야 하는 것이 너무 많아 무거운 것은 아닌지...  헨리와 같은 인물이 아담이라는 창문을 통해서 자신의 장애 직시하게 되었다면, 나와 같은 사람의 장애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영적 인도 관하여...

 

“...두려움, 불안, 고독, 우울, 상실감 등에 오염되어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인도자를 찾아다닌다. 우리는 누군가 영적 지도자 혹은 영혼의 친구 우리를 도와 혼란에서 벗어나게 하고, 내적인 완전함, 자유, 평안에 이르는 길을 보여줄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우리는 대개 명성있고 지혜롭고 심리적인 통찰력과 영적 민감함과 견실한 인생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찾는다. 아마도 문제는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그들 역시 너무 많은 것을 주고싶어 한다는 사실인 듯하다. 따라서 우리는 의존하게 되고 그들은 지배하게 된다. 아담은 내가 만난 인도자 중에서 가장 비지배적이며가장 의존적인 사람이었다...”     

 

본회퍼(Bonhoeffer), “자신이 지니는 권위의 근거와 권한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은 리더들은 잘못된 리더(misleader) 되어버리기 쉽다. 사람들은 자기가 따르는 지도자들을 우상화하고자 하는데, 이런 바램에 스스로 굴복할 리더는 하나님을 모방하는 자의 자리에 앉게 되며,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해악을 끼치는 존재가 된다 경고한 있다.  비지배적인 인도자란, 예수님이라는 목적지까지 안내한 뒤에는 자신은 옆으로 비껴날 아는 참다운 여행 가이드 같은 인도자를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적 운명을 그리도 쉽게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버리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직접 찾고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음성에 직접 귀기울이는 것이 어느덧 너무나 지루하고 막막한 일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런데, 스스로에 관하여는 그렇게도 연약하기만 했던 우리가 막상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이끄는 입장에 서게 되면, 어떻게 그토록 신속하고도 쉽게, 우월감과 다스리고자 하는 마음과 칭송받기 원하는 마음을 가진 자로의 변신을 이룰 있는 것일까?   

 

사역자 우리들...

 

아담이 자기를 통해서,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의 사역은 독특했다. 그는 돌봄이나 사역, 치유, 섬김이란 것들에 대해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데이브레이크가 아담이 공적인 사역을 장소였다고 하는 것이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처럼 아담도 독특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우리 모두는 그분의 세우신 사역자들이다.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 6:29)” 이며, 우리 모두는 부름받았기 때문이다.  매일매일의 삶들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모습은 다양할 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그분을 알고 그분을 닮아가는 점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점에 있어서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서로의 사역적인삶이 주는 귀중한 의미들을 함께 발견하고 기뻐하며 축하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온전히 보고 주님을 온전히 배우기 위하여 섬김 가르침 자리로 나아가야만 한다.  곳에 나아갔을 때에만, 우리가 만나는 영혼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얼굴을 뚜렷이 있도록 도와줄 있기 때문이다.  곳에 나아갔을 때에만, 그들이 우리로 하여금 온전히 그분의 뜻을 배우도록 가르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라는 창문 통해서만 주님은 그분 자신의 형상을 우리에게 조금 온전한 모습으로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한 그의 위대한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당신들이 사랑으로 나를 둘러싸고 있을 때에만, 당신들이 서로 사랑할 때에만 나는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삶은 쓸모없고 나는 짐이 뿐입니다.” 아담은 우리에게 경쟁이 아닌 긍휼만이 인간의 소명을 완수하는 길이라고 믿도록 분명하게 도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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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6 18:29

[이코스타 기고] 노자(老子)가 말하는 ‘성경적인’ 리더상(像) (2/2004)

동양의 사상이나 철학은 뛰어난 관찰과 직관으로 대변되는 그들의 특징적 장점들로 인하여 삶이나 인간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성경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고전의 문구들 가운데에서 오히려 신선한 어법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잘 표현해주는 듯한 말이나 내용들을 종종 발견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만물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는 것만 같아 흥미롭다.  개인적인 소견으로, "어떤 리더가 참된 리더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노자가 제시하고 있는 리더의 네 가지 유형은 그 한 좋은 예가 된다고 사료된다.


노자의 도덕경은 약
5천 자 내외로 구성된 비교적 짧은 책으로, 그 첫 사분의 일 지점을 보면 다스리는 자에 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太上下知有之其次親之譽之 其次畏之 其次侮之

 
다소 의역하여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백성들이 그의 존재를 알며, 차선(second best)의 지도자는 백성들이 그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따르는 지도자는 그보다 못한 지도자이며,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지도자는 백성들에게 경멸당하는 자이다."


재미있는 것은, 백성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지도자는 차선의 리더일 가장 훌륭한 리더는 아니라고 언급하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말하기를, 최고의 지도자는 백성들이 존재를 아는사람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사랑과 존경을 받고있다고 해서 최고의 리더인 것은 아닌데, 그것은 가장 훌륭한 형태의 리더쉽이 발휘되고 있다면 사람들은 자기의 삶과 소명에 더욱 충실하게 특별히 리더 자체에게 집중하거나 연연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자가 말하는 가장 훌륭한 리더쉽은, 앞에서 강압적으로 끌고 가거나 소위 카리스마를 내세우는 스타일이 아니라, 뒤에서 말없이 따라오면서  엇나갈 때마다 “막대기와 지팡이 툭툭 쳐주며 인도하는 가운데 스스로 바른 길을 깨달아 가게끔 이끌어주는 형태이다.  이런 경우, 스스로의 자발성이 위축되거나 손상을 입지 않으므로 자신의 능력과 의지를 다하여 일에 임하게 되는 장점은 있지만, 일이 되어진 결과 자체에 대해서 대개는 스스로의 덕택에 그렇게 줄로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리더에게 어떤 특별한 감사나 존경을 필요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공기나 물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존재에 대해 매순간 특별한 경외심이나 감사한 마음을 품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러한 형태의 리더쉽은 언뜻 보기에는 수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적극적인 관찰과 기다림, 그리고 신뢰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것은 전체를 조망하는 안목과 확신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며, 대상자들 영혼 영혼에 대한 지속적이고 애정어린 관심이 없이는 이룰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일의 진전이 더디거나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답답함 속에서 기다려줄 아는 인내가 요구되기도 하며, 이를 위해서는 근거도 보장도 없는 상황 가운데서 거의 속아주는 것에 가까운 신뢰가 수반되어야 하기도 한다.  붙잡아야할 것을 끝까지 붙잡으면서도 스스로 지치지 않을 있으려면, 끊임없는 자기연마와 더불어 일을 둘러싼 소명 (또는 언약) 자체가 지속적으로 갱신되는 내면적인 과정 또한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과정들을 거치고 뒤에, 공로에 대한 사람들의 인정이나 칭찬조차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비워진 마음이 있어야만 한다.  , 자기 분량의 수고를 애정어린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하고 난 후에 댓가도 없이 이름도 없이 자신의 존재를 감출 수 있는 사람만이 이러한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리더쉽이 가능한가?  사상가나 철학자의 이야기들에는 되어져야할 삶의 모습은 있지만 어떻게 그러한 모습으로 되어갈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주어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아마도 어떤 특정한 방법에 따라서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 가기에는 너무나도 난제들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만큼, 그 내용을 생각하고 말할 수 있었다고 해서 이러한 리더쉽의 실제적인 구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현실적으로는 아직도 요원한 일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나의 삶의 주인이시며, 내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오직 내 안에 그분만이 사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누구보다도 이러한 리더쉽을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일 것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부인이 있는 사람일 것이며,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는 일을 주 안에서의 생의 소명이요 영광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므로,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나보다 남을 귀히 여기며 복음 앞에서는 내 생명조차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살아가는 그의 삶 가운데서 이런 리더쉽의 모습 또한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자가
말로써 표현한,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삶으로 본을 보여주셨던 이러한 리더의 모습에 비추었을 , 자신의 지난날의 모습은 과연 어떠하였던가?  믿음과 사랑 안에 온전히 서있지 못하거나 성실하지 못하여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는인도자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주님의 영혼들을 일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일의 성취를 위한 도구로 삼거나, 그들로 하여금 의무감 때문에 마지못해 따르게 하는사람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더러는 시의적절한 관심과 사랑과 가르침을 주어 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리더가 있었을런지는 몰라도, 칭찬과 인정을 받기 원하는 유혹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주님이 아닌 자신을 바라보게 하거나 아니면 주님과 더불어 자신도 함께 바라보게 만드는 영혼의 걸림돌 되고 말았던 것은 아니었는지
? 

언젠가 신앙의 멘토 분으로부터, 그분이 보이지 않는 격려자 (hidden encourager)” 라는 모토(motto) 일관되게 지니고 살아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난 시간들 가운데서 개인적으로 도움을 받아왔던 영적 멘토들 분을 떠올려보면, 그분들은 참으로 보이지 않는 격려자 면모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년간이나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살펴주어 오신 분들이었고, 올바른 신앙의 길로 스스로 들어설 있도록 지대한 영향을 주어 오신 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고 친근한 자세 때문에 오래동안 멘토링을 받고 있는 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던 분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뒤늦게나마,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말없이 일을 이루어갔던 그분들의 리더쉽이야말로 노자가 말하는 리더쉽이며, 예수님께서 스스로 모범을 보이셨고 말씀 안에서 오늘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시는 성경적인 리더쉽이었음을 깨닫고 있다. 

나 자신 또한 그러한 온전한 리더쉽이 실천되는 삶을 살 수는 없을런지...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과 은혜로써 불꽃같은 시선을 내게 두고서 매순간 인도해 주고 계시는 가장 훌륭한 리더이신 주님께서 안에 함께 하시기에 소망을 가져본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주님의 선하고 온전하신 리더쉽이 나의 가운데에도 조금이나마 묻어날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고린도전서 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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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6 13:05

독서토론: 찰스 셸던, "In His steps" (BKPC, 2003)

소그룹 리더: 이번 주 “In His steps” 소그룹 공부에 관련하여...

11/14/03

 

Overview


이번 주와 다음 주에 걸쳐서 읽고 토론할 부분의 의미에 관하여 먼저 간단하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


이 책의 전체
30 chapter 중에서 19-20 에 해당하는 여기 편지글 부분은, 주인공과 이전에 잘 알고 지내던 한 목사가 우연히 레이몬드 시에 방문했다가 보고 듣게된 이 도시의 영적 부흥에 관한 보고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전의 약 20 chapter에서는 다양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신문사 발행인, 대학 학장, 철도 근로자, 사업가, 예비 오페라 가수, 백만 불을 상속받은 아가씨, 백수 건달, 등)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겪게 되는 영적 도전과 승리의 모습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 반면에, 이 이후의 chapter들에서는, 이 편지를 쓴 목사가 살고 있는 시카고로 소설의 무대가 바뀌어 지면서 레이몬드에서 시작된 영적 각성 운동이 어떻게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는지를 보여주게 됩니다.  따라서, 이번 주에 우리가 함께 읽는 이 편지글은, 소설에서 원래 영적각성이 처음 일어났던 지역에 대한 main review 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이 주는 유익!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결국
, 모든 일 가운데에서 “What would Jesus do?”하고 스스로 자문하면서 ‘주님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자고 하는 도전과 권면입니다.  특별히 성령님의 일하심에 맡기고 순종하며 겸손하게 동행하는 크리스찬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는 점은 이 책의 보석같은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하여,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이 사실은 얼마나 예수님의 마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그리고 예수님에 관한 이런 작은 생각들 하나하나가 얼마나 큰 삶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면, 그 영적 유익은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크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실생활에 보다 효과적으로 적용하기 위하여 다음의 사항들을 제안합니다.

 

1. 이번 주에는, 19 장을 함께 읽으면서 여기에서 review되고 있는 각 인물들의 입장들을 놓고 자유롭게 토론해 보았으면 합니다.  내가 만일 본문에 등장하는 그 사람들이었다면 어떤 구체적인 갈등이 있었을 것 같은지, 그리고 나라면 그런 상황에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 수반되는 여러 어려움들을 어떻게 극복하였을 것인지를 허심탄회하게 함께 나누면 좋겠습니다.  혹 자기 자신 또는 가까운 주변에 참고할 만한 예가 있다면 소개하는 것도 유익하리라고 생각됩니다.    

 

다음 주에는, 20 장을 함께 읽으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실제로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들에 관하여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 상황적 예로서; ① 공부하는 학생의 입장이었다면, ② 진로 결정을 앞둔 senior였다면, ③ 믿지 않는 자와의 교제를 앞두고 고민하는 사람이었다면,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진실하게 자문해 보는 것입니다.  모범답안을 미리 설정하지 말고, ‘내 생각에는 주님이라면 이렇게 하셨을 것 같다’는 각자의 생각들을 솔직하게 나누었으면 합니다.  또 다른 갈등 상황의 예에 관하여는, OO 회장이 ‘신앙 이슈 survey’ 의 결과를 토대로 정리해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주의할 사항?

 

이 책은 분명하고도 강력한 메세지를 담고 있는 반면, 비소설가가 쓴 ‘단편 소설’이라는 점 때문에 여기엔 피치못하게 가지게 되는 한계 또한 있습니다.  모든 조원들이 다 이런 점들에 관하여 깊이 숙지해야할 필요가 있는지는 잘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만, 최소한 리더들은 이러한 점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토론 시에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점들 몇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본 소설에서 보여지는 갈등 상황들은 현실의 모습보다 매우 단순하게 그려졌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저자가 짧은 지면을 통하여 영적각성 운동의 결과적 모습들을 가장 인상깊게 그려내고자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글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의 경우,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갈 것을 일단 한 번 결정한 후에는 그들의 결심은 거의 변하지 않고 일관되이 유지되고 있으며, 성령님께서는 즉각적으로 그들에게 감동과 능력을 주셔서 단시간 내에 영적 각성의 결과를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경우에도, 한 번 결단을 내리기만 하면 곧 여기에서와 비슷한 결과를 거둘 것 같은 인상을 가지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결단했음에도 그 결단을 지속적으로 지켜나가지 못하거나 핍박을 받는 동안 회의감에 빠져드는 경우, 영적 승리를 이룬 후에 자고하여 진실성과 성령의 역동성을 상실하는 경우, 더 나가서는 살아 생전에 자신이 뿌린 씨앗의 결과를 보지 못하는 경우들 역시 있을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2. 영적 각성의 결과가 반드시 큰 일들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소설에서는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빈민굴, 술집 추방, 직업 포기, 전재산 기부 등의 일들을 강조하여 거론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일들의 중요성과 의미가 조금이라도 과소평가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있다면 우리는 오늘 당장에라도 그 부르심을 따라서 낮디낮은 곳으로 주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하여야 합니다.  다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프리카에 가야만 선교가 가능한 것이 아니듯이, 무언가 사람들이 다 감동하여 크게 머리를 끄덕일 만한 일이 아니라고 해서 가치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잊지말자는 것일 뿐입니다.  주님에게도 3년의 공생애 사역기간 전에는 30년 동안의 준비기간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큰 일보다 오히려 작은 일에 충실하는 것이 더욱 어려울 수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 큰 일을 하는 것만큼 exciting하지 않은 반면에, 오히려 더욱 높은 경지의 discipline을 가질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작은 일에 먼저 충성하여야 함을 성경의 여러 곳에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지금 이 순간 주님을 따를 것을 요구하신다면 우리는 이에 대하여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실 ‘만한’ 일에 매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순간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 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 마지막으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스스로 질문하는 경우에 감정적인 해석 내지는 주관적인 의지와 노력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 땅에 오셨던 것은 오직 한 번, 즉 한 시대에 한 지역에 십자가 대속을 이루는 구원자의 역할을 가지고 오신 것 밖에는 없으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가 질문하는 그 문제의 입장에 서셨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셨을런지 우리는 사실 잘 모르는 경우가 분명히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비록 주님 자신은 육신의 연약함과 육신의 일들을 체험적으로 다 이해하고 계시지만, 우리 생각으로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런지 다 헤아려 알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피조물인 우리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우리가 지금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고자 하는 일 그것 밖에는 당장 아무 것도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럴 때 조차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적이거나 주관적인 면들을 절대화하지 말고 우리에게 이미 주신 성경 말씀들로 하나하나 각주(footnote)를 달아가면서 주님의 가르치심을 말씀의 빛 아래에서 차근차근히 조명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에서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말씀은 참으로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그런 만큼, 평소 성령님께 지속적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부지런히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면서 평상시에 영적 체질을 강건하게 하는 일은 능력있고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데에 필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우리보다 먼저 살다 간 믿음의 선배들이 말씀 안에서 어떻게 살아갔었는지를 되새기는 일 역시도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삶,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모습을 그려보는 데에 큰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사항들은 알아두고는 있자는 취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주의할 점들을 생각하지 못하여 균형있는 신앙인의 삶의 모습을 잃게 된다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주의 사항들에 너무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다가 정작 중요한 핵심 메세지를 놓쳐서도 안될 것입니다.  이 점에 관하여는 리더 여러분 각자가 기도로 준비하고 성령님의 인도 및 지도하심을 따르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귀한 일에 수고하심에 주 안에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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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6 11:30

독서토론: E. Peterson의 "Leap over a wall" (BKPC, 2002)

1. Inward:  "말씀과 예배의 '정신' 주목하자"
(
말씀: 사무엘상 21~22; 베드로후서 1:5 – 믿음//지식; EP Ch.6 – 다윗&아히멜렉)

~ ‘
성소(聖所; Holy place)’ 무엇을 하는 곳인가?
~ 거룩한 삶을 위한 나의 거룩한 장소는 어디인가? 어떤 모습인가? 
~ 나는 하나님을 만나는가? 언제인가? 어떻게인가? 

  

2. Upward:  하나님의 '아름다움' 주목하자
(말씀: 사무엘상 25; 베드로후서 1:6 – 절제/인내/경건; EP Ch.8 – 다윗&아비가일)

~
삶에서 온전하고 순수하게 시작되었던 /관계/사역이 중도에 흐려지도록 만든 것은 무엇인가? 
~
하나님에게로의 focus 회복시켜주는 나의 아비가일 있는가?
~
다른 사람의 신앙 회복을 도와주어 아비가일 경험이 있는가?

 

3. Outward:  내게 주신 '소명' 주목하자
(말씀: 사무엘상 18~20; 베드로후서 1:7 – 형제우애/사랑; EP Ch.5 – 다윗&요나단)

~
좋은 일을 했는데 비난을 받고 최선을 다했는데 반대를 겪어본 일이 있는가?
~
나의 존귀함과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주는 나의 요나단 있는가?
~
나는 누구에겐가 그의 존귀함과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주는 요나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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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6 11:21

독서토론: C.S. Lewis의 "고통의 문제" (BKPC, 2002)

1.     (문제 제기)  “하나님이 선하고 전능하다면, 왜 피조물들이 고통을 당하도록 허락하시는가?”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자신이 만든 피조물들에게 완벽한 행복을 주고 싶어할 것이며,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그 소원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피조물들은 행복하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하지 않는 존재이거나 능력이 없는 존재, 또는 선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존재일 것이다...??”

 

2.     (본문 중에서)  “고난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우리가 형통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우리가 기도할 때 말씀하시며,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 함성으로 소리치신다...” 

자유의지를 주고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놓음으로써 피조물에게서조차 등돌려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야말로 그분의 완전한 겸손함을 의미한다...”

악하면서도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무언가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 자신이 우주의 법칙에 따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다. 고통은 개심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제공하며,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신다'...”

 

3.  (고찰 & 적용)  내게 있어서 고난의 문제란 무엇인가..?”

고난의 주님 vs. 부활의 주님 / 하나님의 공의 vs. 하나님의 사랑 / 온전함 vs. 용서함 / ~의 관계들...

왜 내게 고난이 어려운가?  -->  세상의 핍박과 저항이 두려운가? / 먹고사는 문제, 생존을 염려하는가? / 포기할 수 없는 세상의 것 명예, , 욕망 에 집착하는가?   

영적전쟁을 이기는 나의 믿음의 현주소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나의 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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