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에 해당되는 글 21건

  1. 2009.04.10 죽음에 관하여
  2. 2009.02.25 싸움의 달인에게 배운다 (2)
  3. 2008.11.27 Thanksgiving (2)
  4. 2008.11.17 a new phase!
  5. 2008.10.15 분주함
  6. 2008.09.17 공동 생활에서 중요한 것? (4)
  7. 2008.09.05 강함의 장애 (앞 글에 이어서...) (4)
  8. 2008.08.25 '예쁜 부부'와 함께하기
  9. 2008.08.18 목표 점검 (5)
  10. 2008.08.13 상담에 관한 잘못된 생각...
  11. 2008.08.05 Ch. 2의 윤곽 --> '공동체 실험' (8)
  12. 2008.08.01 이웃으로 인한 감사! (4)
2009.04.10 09:58

죽음에 관하여

죽음의 가능성에 대면하여 서보았을 때
예상외로 두려움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예상하지 못했던 슬픔의 흔적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였음에 관한 것임을 알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죽음의 이유가 온전히 사랑뿐이셨던 주님의 매달리심 앞에 서서야 그것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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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5 19:30

싸움의 달인에게 배운다

무도계의 전설로 알려진 최배달씨가 아마도 미야모도 무사시의 이야기를 언급할 때 한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사시에게는 열 명을 상대하는 일이나 백 명을 상대하는 일이나 똑같았다. 그는 어느 경우이건 매 순간 전후좌우 네 명씩하고만 상대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친절하게 리마인드 해준다. 한걸음 더 나아가 "나는 한놈만 패"라고 말한 어떤 영화 속 등장인물도 있었노라고.. ^^)

영화 속에는 한꺼번에 수십 명을 두루두루 담당하며 무찌르는 super hero들이 등장하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픽사나 할리우드의 세계일 뿐이다. 너무 많은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그 누구도 상대하고 있지 않은 것과 동일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거대담론을 이야기하는 것에는 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나무' 없이 늘 '숲'만을 이야기하곤 한다면, 그것은 아직 그 숲에 직접 가본 적은 없다는 반증에 다름아닐 수도 있다.   

내가 속한 공동체, 지역교회, 또 지역사회가 변화되는 것에 관해 무슨 일부터 해야할런지 참 고민되고 막막하게 느껴지는 지금이야말로 그런 면에서 거대담론으로 흘러버리기가 참 쉬운 때인 것 같다. 이런 때에 엉뚱하게도 '싸움의 달인' 이야기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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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7 10:36

Thanksgiving

1. 인생의 터닝포인트로 이끄심에 감사
2. 가족성, 공동체성, 공동생활을 통한 배움과 위로 주심에 감사 
3. 목마름의 시대에 보여주시는 생명의 소망에 동참하게 하심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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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7 11:09

a new phase!

6년 단위로 의미적 일관성을 지녀왔던 지난 삶의 phase들...
그 또 하나가 지난 주말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다시 새로운 phase가 시작되고 있다.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대전에서 보낸 대학-대학원 시절 6년, 미국와서 보낸 유학시절 6년, 그리고 hp에서 풀타임으로 보낸 지난 6년...

그 중간중간마다 안식년의 의미로 삼아진 시간들도 있었다.
고등학교때 1년간 가졌던 휴학 시기, 대전시절 이후에 회사생활 및 유학준비로 보낸 2년 반의 시절, 그 이름도 거창한 General Nanoelectronics LLC에서 일한 반년, 그리고 학위를 마칠 것인가 회사로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동안 UCB와 hp에서 각각 해프타임으로 보냈던 한 학기...  

지난 phase는 아마도 위로, 치유, 결혼, 회복, 휴식, 공동체성 눈뜨기, 리더쉽 레슨, 공적 소속감의 결여와 사적 연대감의 강화, 형통의 함정, 내면의 어두움, 영적 목마름, 멘토링, 내면여정 시작하기, 공적 삶을 향한 발돋움, 등의 표현들로 특정지워질 만한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고난과 꺾임과 내려놓음이라는 일관된 커리큘럼에 따랐던, 그러나 영적으로는 가장 영광스런 시기이기도 했던 그 직전의 phase와는 여러 면에서 대조/비교를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만난 하나님은 가까이에 계셨지만 이전에 비해서는 훨씬 subtle하게 말씀하셨고, 이성-의지적 접근 및 공동 참여에의 영역으로 한 발자욱 더 가까이 다가오도록 초청하신 분이셨다. 전반 3 년간의 영적 상승기와 후반 3 년간의 하강기를 가지게된 정확한 원인들과 의미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객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밖에, 돈이나 기득권에는 naive할 정도로 마음쓰지 않았지만, 위압, 통제욕, 이기심, 무정함, 판단정죄함, 권위주의, 위선과 같은 인격/자세의 측면들과 대면하는 곳에서는 왜 그리 분노하고 offended되며 집착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죽음 앞에서 다소 의외일 정도로 두려움이나 불안함의 동요가 엿보이지 않는 가운데 그 기저에 흐르고 있던 싸한 슬픔의 정체는 무엇이었는지 등에 관한 해석이 과제로 남는다. 적용적 측면에서는, 그런 점들을 가지고서 어떻게 앞으로 다른이를 돕는 일의 도구로 승화할 수 있는지 방법을 찾아야할 것이다.  
 
새 회사는, 곧 만들어질 더욱 새로운 회사를 spin off시키는 우산 역할을 하게될 former partner 회사이다.
허황된 꿈이나 야망으로 시작하기보다는 소박하고 인간적인 두 가지 이유로 시작하는 그 동기들이 감사하다. 
우리가 개발한 기술을 채택해주지 않으니 스스로 한번 만들어보자는 '소박한' 엔지니어 정신이 그 첫 번째 이유요, 비정규직 네 명을 계속 유지/간직할 수 있으려면 자리와 펀드를 마련해야 한다는 다분히 '인간적인'(실용적인 면도 있긴 하지만..) 필요가 두 번째 이유였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은, 내면의 문제와 씨름한다는 명목 하에 팀의 한 멤버로서 회사와 동료들을 위해 이전만큼 기도하지 못했고 업무 충실성과 기여 측면에서도 마음의 빚을 지게된 것 같다. 한편, 직장인으로 부르신 곳에서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배우는 점에서도 아쉬움이 남는다. 지난 시간 많은 위로와 영감이 되어준 이 팀과 리더에게 대한 마음의 빚을 갚고, 직장인으로 부름받은 삶에 대해서도 좀 더 제대로 배우는 이 두 가지 의미를 잘 채워가는 앞으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그들이 잘되는 것'을 나의 업무 목표로 삼아 매일 실천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기간 동안 가정의 영역에서는 어떻게 심고 열매맺는 의미를 가지게 될런지 궁금하다. 때로 서로 마주보고 때로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펼쳐가고 맞이하여야 할 각자의 삶의 반경들의 총합은 과연 어떤 새로운 다이내믹스와 궤도를 형성하게 될까? 가족들과 영적 가족들을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할 수 있도록 허락될런지...  

내적으로 먼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주신 후에 외적 환경의 phase도 새로이 조성해주신 점에 무엇보다 감사한다. 
마침 지난 주말을 마지막으로 시편 150편의 묵상도 절묘한 타이밍으로 보조를 맞추어 마쳐지게 된 점 또한 '한 대목의 마무리'라는 측면에서 의미있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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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5 20:40

분주함

요즘 극도로 분주하다.
지난 넉 달간의 분주함은 최근 2~3 년의 시간 프레임 안에서도 가히 최고였던 것 같다.

특히 뭔가 영적인 활동을 하려하면, 몇달 전 혹은 몇년 전부터 만남을 약속했던 '반가운' 사람들이 매 주말
두어 군데로부터 찾아온다. 중요한 일도 놓칠 수 없고 반가운 사람을 만나는 일도 포기할 수 없는 형국이다. 
그런데 하나 신기했던 것은, 영적 활동이 하나 종료되어 잠시 휴식기를 맞으면 찾아오는 발걸음도 줄어든다.
그리고, 그런 중에도 뭔가 기회가 생기면 오히려 더 일을 만들고 남아있는 빈 시간을 채우는 자신의 모습도 본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이상하리만치 그런 일들이 힘이 들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끝낸 일들에 대해, 또 바쁜 와중에도 나름 최선의 시간을 함께 만든 그 사람들로 인해 기쁨이 느껴진다.  
분주함 가운데서 그분께 다급하게 의지하고 안도의 감사를 드리는 과정들 가운데 교제가 깊어지는 느낌도 든다.

이건 도대체 무슨 일인지..
지난 시간들 가운데 한 큰 묵상 주제가 되었던 그 '분주함'과는 조금 다른 뉘앙스로 다가오는 면모가 새롭다.
그렇다고 분주함, 또는 분주하게 만드는 일 자체를 찬양하고픈 마음은 없지만...

이런 다소 '생소한' 삶의 모드로 부르고 계시는 그분의 깊으신 뜻과 의도는 과연 무엇일런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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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7 09:33

공동 생활에서 중요한 것?

공동 생활을 잘하기 위한 핵심은 어떤 점들일까?

우선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가 떠오른다. 
1. 상대방이 잘되는 것을 우선하고 서로를 위해 기꺼이 양보하는 사랑과 섬김의 마음가짐  
2. 신뢰를 바탕으로한 솔직하고 열린 의사소통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들어주고 받아주는 일

그런 점들에서 최고의 동반자들인 그들로 인하여 감사하고 그들을 허락하신 그분께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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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5 13:52

강함의 장애 (앞 글에 이어서...)

삶을 돌아보는 때마다 종종 흥미롭게 관찰되곤 하는 점 한 가지는, 통념과 다르게도, '약함'이 주는 장애보다 '강함'이 주는 장애가 더 훨씬 더 크고 치명적일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약함의 장애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하는 정도에서 대개 그치지만, 강함의 장애는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과정에서 내 손으로 자신과 이웃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파괴하고 희생시킬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강함의 장애가 가지는 또 한가지 무서운 면은, 이 장애 자체를 본인 스스로가 확대하고 싶어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따라서, 세상 방식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고 오히려 그 시스템 안에서 인정받을 수도 있을 만큼의 힘과 지식과 skill과 권한과 영향력이 내게 '충만히' 있을 때에는 대개 '무력하게' 세상의 논리를 따르게 되기가 쉬운 것 같다. 본인이 가진 권리와 권한에 자신 스스로가 한계를 설정하고 언제든 '내 소유됨'으로부터 내려놓을 수 있는 '청지기의 마음가짐'을 점검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여기엔 거의 '장사'가 없는 듯 보인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역하는 때에 조차도 상황은 별반 크게 다르지 않을 때가 많은 것 같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거룩하신' 하나님의 세계를 목표로 하여 '거룩하지 않은(=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을 동원하는지 알 수 없다. 사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방식이기 이전에 먼저 마음가짐이요 자세이다. 다른 이를 볼 때에는 '자신을 비운' 사람을 대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환호하고 찾으며 때론 그렇지 못한 이를 두고 정죄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자기 스스로가 그런 길을 의지적으로 선택하여 가는 사람은 극소수일 뿐이다.('황금률' 적용의 문제?!)  세상을 거스르는 일이란 그만큼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할 뿐 아니라, 오히려 인간 스스로의 힘은 이를 거스르는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들 때가 많다. 그 길은 오직 십자가에 '내'가 그와 함께 못박힐 때가 아니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럼, 오늘 지금의 나는 '내가 살아있는' 나인가 아니면 '십자가에 죽은' 나인가?

내게 있는 약함을 탓하기 전에, 내게 주어진 강함을 의지하기 전에,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물어야할 'question'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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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5 12:37

'예쁜 부부'와 함께하기

'예쁜 부부'가 날아와서(?) 우리의 조그만 둥지에 잠시 머물다 갔다.
머물다 간 시간을 짧았으나 머물렀던 여운은 계속되는 듯하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사람들 보기에 아름다운 사람들과 만나
삶을 나누고 믿음을 나누는 그것이야말로 인생사는 privilege가 아닐런지 싶다.    
 
아름다운 가정 이루어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넉넉히 세상을 섬기는 이들 되시고
이 목마름의 시대에 '진짜' 인생 되시어 세상을 축복하는 이들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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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8 11:38

목표 점검

주안에서 그들이 영적으로 잘되고, 삶이 통합되며, 생명에 기인한 참다운 행복을 누리는 일을
나의 일차적인 목표로 삼을 수 있겠는가?
 
이를 위해 그 누구의 인정함과도 무관하게 기꺼이 준비하고 댓가를 지불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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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3 09:53

상담에 관한 잘못된 생각...

줄 수 있는 답을 다 주는 것.
정답을 지금 주는 것.
내가 답을 주는 것.
답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

- inspired after a conversation with the men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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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5 12:08

Ch. 2의 윤곽 --> '공동체 실험'

너무나 자연스런 계기로, 지난 몇 년동안 캠퍼스 성경공부 모임에서 한 식구로 지내온 가족과 더불어 앞으로 일 년간 함께사는 '실험'을 해보게 되었다. 사실 '공동체 생활'을 해보자는 어떤 '당위'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구체적인 '필요'들이 만난 지점에서 자연스레 나오게된 결정이었다.  

서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생각하게 되었고, 별도의 논의가 필요없었을 정도로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며, 또 모두가 넘치는 기쁜 마음으로 이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에는 분명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루는 일에 마음을 열어둔 면이 있었던 우리 내외로서는 이런 생각들을 해보았다.
"이 가족이라면 한번 같이 살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가족과도 어렵다면 공동체 생활은 우리의 분량을 넘는 일이니, 그땐 뜻을 접자." 
재미있는 사실은, 두 가족이 정확하게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점이다...   

마침 좋은 집이 하나 나왔다. 두 가족이서 각각 형편에 맞게 취할 수 있는 분량이 '하나'씩이었다면, 이 경우엔 같은 경비에 '1+1=3' 쯤 되는 것 같다. 지난 주말에 가본 결과 다섯 명 모두의 마음에 들어 signed application을 내고 왔다. 만일 offer가 안오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일 터... 결과가 어찌되었건 다음 스텝도 신실하게 인도해주실 것이다.  

본회퍼가 "Life Together"에서 했던 명언, 즉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이루어야할 이상(ideal to realize)이 아닌, 참여해야할 현실(reality to participate)이다" 라고 했던 이야기가 다시금 생각난다. 

사역적 삶으로의 부르심을 가장 구체적으로 느끼기 시작하는 때에 일어나는 예기치않은 일이라 더욱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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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1 01:19

이웃으로 인한 감사!

센스와 스윗함이 성육신하다!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이 펼쳐주시는 리얼리티에 '참여'하는 것이 부르심받은 자들의 삶임을 배워가는 가운데에도,
때로는 어린아이스런 작은 소원들을 리얼리티에 반영해주시는 자상하신 손길을 종종 경험하곤 한다.

그 통로가 되어주는 이웃들. 그것을 깨닫게 해주는 이웃들.

예전에 가족을 생각하면서, 세상에서 만났어도 가장 좋아했을 그 사람들이 다름아닌 내 가족들임에 감사했었는데,
오늘 그들을 바라보면서는, 멀리서 알았어도 마음이 따뜻했을 그들과 로컬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했다.

아름다운 그들이 아름다운 가정들을 이루게하시고, 아름다운 그들의 미소들을 아름답게 지켜주시길 소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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