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여정'에 해당되는 글 13건

  1. 2010.07.06 전환기 내면여정 (6) - examples, guides, misleaders (4)
  2. 2010.07.04 전환기 내면여정 (5) - 에니어그램
  3. 2010.06.25 전환기 내면여정 (3) - 중년기의 위기 (영적 측면)
  4. 2010.06.22 전환기 내면여정 (2) - 인생의 시기들
  5. 2010.06.21 전환기 내면여정 (1) - 이제 조금 보인다! (4)
  6. 2010.04.09 a spiritual breakthrough
  7. 2009.10.08 life verses (2)
  8. 2009.10.06 알아차림
  9. 2009.08.07 에니어그램
  10. 2009.07.22 용서에 관하여 (7)
  11. 2009.06.01 자유함에 관하여
  12. 2009.04.10 죽음에 관하여
2010.07.06 07:15

전환기 내면여정 (6) - examples, guides, misleaders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 가운데서, 평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좋은 만남을 허락해주신 복을 잊을 수 없다. 바랄 수 있는 최고의 부모님과 동생과 가족들을 주신 것을 시작으로, 최고의 아내와 최고의 영적 가족들과 최고의 멘토들과 최고의 동료 및 선후배들을 허락해주신 것은 진심으로 과분한 복이었음을 고백한다. 

그 가운데서, 내 삶의 표상이 되고 가장 지대한 영향을 드리워준 세 분의 examples, 어둡고 캄캄하기만 했던 영적 내면여정의 안내자 역할을 해준 세 분의 guides, 그리고, 비록 그 행위에 있어서는 감사할 바 아닐지라도 돌이켜보건대 그 존재로 인해서는 감사하게 되는 세 분의 misleaders를 기억해본다. 이분들과 삶이 연결되고 함께 시간을 나눈 인연들에 대해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느낀다.     

1) 3 examples (내면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신 분들)
 1. 내가 아는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분이셨다. 주변의 거의 모든 친척들과 많은 친지들을 평생 자신의 그늘 아래에서 보호해주고 도와주고 어려움을 해결해주셨다. 소박한 스타일이시나 세상을 품은 가슴만은 큰 분이다. 내게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어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보여주신 분이다.

 2. 장로님은 아직 내게 아무것도 보이는게 없을 때 먼저 믿음부터 주시고, 언젠가 정말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사랑으로 이끌어주신 분이다. 한없이 커보이기만 하는 분이면서도 본인의 연약함을 보여줄 수 있는 드문 멘토셨다. 내게는, 한번 택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인품을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보여주신 분이다. 

 3. 매니저는 누구보다 유능하고 수고와 공로가 많은 사람이면서도 공을 부하직원들에게 돌리고 사람을 품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합리적인 비전과 솔선수범의 자세와 화합의 능력을 함께 가진 그는 여지껏 보아온 가장 성숙한 3번 유형의 전형이다. 내게는, 거저주신 믿음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음을 일깨워준 분이다. 

2) 3 guides (내면을 바라보는 법을 도와주신 분들) 
 1. 간사님은 영적으로 방랑하던 나에게 먼저 다가오셔서 자신의 목마름과 여정을 보여주고 나의 가는 길에 지도를 제시해준 분이다. 본인의 여정에서 이룬 것과 미완의 진행형인 것들을 진실하게 보여주었기에 나는 무엇을 짚어보고 추구해야 할런지를 헤아려볼 수 있었다. 이분이 계셨기에 나는 내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2. 목사님은 내면여정의 가장 어려운 길목을 돌려고 하는 그때에 그 길을 혼자 걷지 않도록 보내주신 guardian angel 이셨다. 영적성장과 훈련에 관해 누구보다 깊은 이해를 가진 최고의 스승으로서, 내가 걸어가는 구체적인 과정을 헌신적으로 점검해주고 코치해주셨다. 이분이 계셨기에 나는 가장 어려운 순간에 길을 잃지않을 수 있었다. 

 3. 집사님은 어떤 학습이나 훈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의 질병과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직접 빚어내신, 내가 직접 아는한 최고의 영성가이시다. 영적여정이 깊어지면서 어떤 지점을 통과하고 도달하는지를 몸으로 보여주셨다. 이분이 계셨기에 나는 이 과정들의 목적을 깨달을 수 있었고 구체적인 소망을 잃지않을 수 있었다.  

3) 3 misleaders (내면의 충동에 충실하게 사신 분들) 
 1. A님은 자신의 깊은 상처로부터 말미암은 낮은 자존감을 다른이에게 투영시켜 사람들을 억압하였다. 위선적 신앙의 무서움에 대한 경각심 및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포기하지 않아야하는 중요성을 깨닫도록 도와주었다.

 2. B님은 자신에게 몸을 맡긴 사람들의 약점과 절박함을 자신의 성공을 위해 이용하였고, 끝내 자신의 야망을 이루어냈다. 나 자신의 무력함과 3번 유형이 가질 수 있는 어두움에 대해 뼈아프게 생각해보도록 도와주었다.    

 3. C님은 선한 이상과 자기중심적 이상이 권한과 얽히면서 많은 미묘하고 복잡한 문제를 만들어냈다. 좋은면과 나쁜면을 선명하게 나누기 어려웠던 만큼 분별력의 중요성과 거짓자아에 대한 이해를 더하도록 도와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 1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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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4 07:15

전환기 내면여정 (5) - 에니어그램

우리는 옳은 일을 하지만 종종 옳지않은 동기로 그렇게 할 때가 있다. 다른 사람을 돕고 친절을 베풀 때에도 종종 그 동기가 순수한 사랑 이외의 것일 때가 있다. 사역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헌신이지만 방법상으로는 세상을 그대로 닮은 논리와 방법으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런 면에서, 신앙 여정이 도달해야할 궁극의 지점은 '동기'와 '의도'의 문제라는 지적에 나 또한 전적으로 동감한다.     

에니어그램이 영성훈련의 도구로서 유용할 수 있는 이유는, 각 성향의 긍정적인 면들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면들도 보여주며, 더 나아가서, 특정한 형태의 행동이 유발되는 동기에 관한 인사이트를 주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장점이 동시에 그 사람의 어두운 그림자와 동전의 양면같은 관계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측면은 우리 내면에 관한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일깨워주는 데에 특히 유용하다.  

물론 에니어그램은 진리도 아니고 법칙도 아니며, 과학적이라고 하기엔 기원도 다소 불분명하고 다분히 직관적인 면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을 돌아보고, 특히 내밀한 어두움에 대해 한번 진지하게 숙고해볼 거리를 제공하는 점은 영적성장을 위한 '진단'의 도구로서 유용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진단'의 도구인 만큼 '치료'를 보증하지는 못하며, 정확한 진단을 내리는 일 자체도 사실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에니어그램처럼 사람의 성향을 다루는 typology를 사용하는 경우에 가장 빠지기 쉬운 일반적인 잘못은 자신과 상대방을 어떤 특정한 타입이라는 '상자' 안에 가두어두는 일이다. 이를테면, 겉으로 드러나는 몇 가지의 특성을 바탕으로 한 사람을 A 성향이라고 판단한 후부터는 A 성향의 일반적인 특성으로 알려진 사실들을 역주입해서 사람을 틀에 가두는 것이다. 이런 경우 영혼의 자유함을 위한 도구로서 기능하기보다는 오히려 영혼을 속박하는 도구가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내가 3번 성향인지 아니면 과거에 어느 기간을 이 성향처럼 살았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며 한 가지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후로부터 내 삶에 주어진 하나의 큰 과제는 3번 성향의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는 일이었다는 점이다. 영적 성숙의 과정에서 '알아차림(mindfulness)'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에 에니어그램을 알기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온 어떤 일에 관해 그 내막을 이해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 도움을 받게해준 경험은 이 도구에 대해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한 자연스런 계기가 되었다.  

3번 성향의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는 활기차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부지런하고 유능하고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목표와 성취에 대한 강한 동기부여가 있고 올인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는 만큼 실제로 많은 것을 성취하기도 하고 소극적인 성향의 사람들로부터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센스와 언변이 뛰어나므로 타고난 홍보담당자나 팀에 동기부여를 해주는 분위기메이커의 역할을 잘하기도 한다. 특정 영역, 특히 과다한 업무량과 빠른 판단력을 요구하는 현장에서는 이 성향들이 아니면 효율적인 일처리가 어려운 경우도 있다. 거기에 더해서 미국식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적 가치체계 자체가 이 성향이 추구하는 바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아서 실제로 유명한 경영자나 정치가 등 가운데 이 성향의 사람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 유형이 갖는 장점이 많은 만큼, '빛'이 강할수록 그것이 만들어내는 '어두움'의 그림자도 더욱 깊어진다. 3번 성향의 경우는, 무한하고 충만하신 하나님과 함께할 때의 삶이 갖는 '가치'가 상실된 빈곳을 인간적인 노력의 산물로 대체하고자 하는 것으로부터 모든 굴절과 어려움이 야기된다고 에니어그램은 설명한다. 여기서의 대체 가치는 '성취'이다. 하나님도 자신도 다른 사람도 아닌, 성취, 업적이란 '제 3의 자아'가 다른 이들에게 투영되어 나타난 반응으로 자기의 정체성의 근본을 삼는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과정보다는 성취의 결과를 중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모습을 중시하며 이미지메이킹에 많은 신경을 쓴다. 자신이 속한 사회적 기준이나 요구에 부응하고 인정을 받고자 끊임없는 변신을 이룬다. 좋은 의미에서 adaptive한 이 성향이 부정적으로 작용하면 일관성이 없고 deceiving한 모습이 되기도 한다. 효율을 중시하는 만큼, 일이 성취되는 데 필요한 이상의 수준을 추구하거나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 영역으로 혼자만의 깊이를 더해가고자 하지 않는다. 그래서, 뛰어난 언변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의 분량에 비해 실제 이해하는 바는 더 피상적인 경우도 생긴다. 실패를 극도로 회피하는 만큼 성공이 확실해보이는 일에만 뛰어드는 경향이 있고, 명문 학교나 사회의 이름에 기대어 자신의 정체성을 높이고자 하기도 한다. 성취에 방해가 되는 감정을 억누르므로 모든 유형들 가운데 자신의 감정을 가장 잘 모른다고 알려져있다. 긍정적인 자화상을 가진 이면에는 자기 감정에 대한 엑세스가 적다는 점이 이유가 되기도 한다. 적극적인 성향과 자신의 감정을 잘 모르는 면이 결합되면 공격적인 적개심을 품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어렵다. 자신이 유능하다는 정체성이 중요한 만큼 자기자랑을 하지 않기도 무척 어려운데, 이미지를 아는 사람이므로 '세련되고' 은근한 방법으로 한다. 그런 가운데 삶은 점차로 '만들어낸 가치'의 이미지와 임팩트에 염두를 둔 '연기'에 가까와져간다... 

대인관계의 영역에서 3번 유형에게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은 '조건없는 사랑'이다. 사람에 대한 케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자신의 목표에 도움이 되고 유용한 사람에게 마음도 따라가는 경우가 많으므로 사람의 존재 그 자체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 외교에 능하고 어떤 사람과도 원만하게 지내는 편이지만, 솔직하게 깊은 속을 나눌만한 친구는 별로 없는 경우가 많다. 친구를 사귀지 못해서가 아니라 필요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쟁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은 때로 무심코 내뱉는 말이나 농담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자신의 솔직하지 못함을 인식한 사람 가운데서는 더러 지나치리만큼 자신을 오픈하는 경우도 있다. 덜 '세련되어' 보이지만 내면여정에 있어서는 오히려 한 걸음 앞서간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여러 사람이 함께 이룬 성과의 크레딧을 자기에게 돌려버리는 것은 이 성향의 큰 문제이다. 대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므로, 그런 모습을 주위에서 인식해도 스스로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성취의 목표를 위해서는 냉혹한 승부사가 되어 주위 사람들이나 가정을 희생시키기도 한다.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역할도 '공동 창조자' 또는 '공동 운영자'에 가까운 면이 있어서 여러가지 장단점을 함께 가져올 수 있다. 

이 성향의 문화가 지배하는 그룹도 개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취동기나 업적은 뛰어나지만 인간미는 부족하기가 쉽다. 이러한 경향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하며, 특히 미국 사회와 오늘날의 한국 사회의 문화, 그 가운데서도 기업문화는 이 유형의 성향과 맞닿아있는 부분이 많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와 문화 안에서 '성공'하여 높은 자리에 이른 정치, 기업,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존경할만한 사람을 찾기가 드문 것도 무리는 아니다. 교회마저도 성공주의, 물질주의적 철학으로 향해가는 것도 이런 문화적 영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3번 유형이야말로 모든 유형들 가운데서 진정한 영적 성장이 가장 힘든 유형이다" 라고 하는 이야기를 여러 영성가들로부터 들었다. 그들이 그와 같이 입을 모으는 것은, 첫째, 자기 자신을 은밀하게 속이는 경향이 모든 유형들 가운데서 가장 크기 때문이며, 둘째, 내면과 영혼이 망가진 상황에서도 외면적 삶에서는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는 드문 유형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런 이슈들을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발견하고 인정하는 과정은 실로 depressing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때로는 '성취하지 못해도 괜찮아' 하며 자신의 어깨를 두드려줄 필요도 있다. 그래야 다른 사람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유형에게 주어진 최대의 위로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첫 백성을 조성하실 때 다름아닌 3번 유형의 archetype인 야곱을 택해서 '이스라엘'을 만드셨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가장 작은 사람과 족속을 택하시고 가장 당신께 어렵고 불리한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는 전능하신 그분의 면모는 야곱을 선택하신 점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그러나, "속이는 자"라는 이름을 가졌던 야곱으로서는, 자신의 거짓자아를 벗고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갈만한 사람으로 다시 빚어지기까지 더 많은 속임을 당하고 평생 "험악한 세월"을 살아야했다. 하지만, 그 결과로, 한때 자신의 안전을 위해 처자를 형 에서의 군사들에게 넘겨버릴 생각도 할 수 있었던 그가, 결국에는 그토록 문제 많던 열두 아들 중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이스라엘의 지파들로 세우는 삶의 경지에 이르는 복을 누리게 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2-23)



참고) 
1. 에니어그램은 '수평적 다양성(즉, 9 가지의 유형)' 뿐만 아니라 '수직적 성숙도(즉, 9 가지의 레벨)'를 제시하는데, 전자는 인간관계의 측면에, 후자는 영적훈련의 측면에 활용할 수 있다.  
2. 오늘날 소개되는 에니어그램의 내용은, 전래된 프레임웍 위에 지난 30년 동안의 심리학적 성과와 일부 영적 영역에 대한 고찰의 결과들을 덧입힌 형태인 것으로 이해된다.  
3. 이론화는 대개 단순화를 의미하므로 이론은 있는 그대로의 실제를 다 담아내지 못한다. 에니어그램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부가적인 이론이나 예외에 관한 이론들이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계속 소개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
4. 에니어그램에 대한 첫 소개는 이재천 목사님, 영적 진단의 도구로서의 적용은 권희순 목사님, 그리고 수직적 성숙도와 현재 진행중인 이슈들에 관해서는 미국 에니어그램 협회 소속 웍샵 인도자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한편, 일반적인 이해와 적용은 Riso & Hudson, 영적 측면에 관한 이해와 적용은 Rohr와 Zuercher의 책들이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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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5 07:00

전환기 내면여정 (3) - 중년기의 위기 (영적 측면)

'중년기의 위기(midlife crisis)'는 본질적으로 '의미'의 문제이다.

'나는 왜 이런 방식으로, 이런 일들을 하며 살고 있는가?', '무엇을 향해서?',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

그 결과로, 가정이나 인간관계의 측면에서 심각한 영향을 받기도 하고 커리어를 포기하거나 바꾸기도 한다. 그런만큼 결코 가벼운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우울증과 같은 병리적 현상이나 어떤 드라마틱한 상황에까지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나이대에 이르러서 영적인 차원의 '어두운 밤'을 다양한 레벨에서 경험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흔히, 그리고 광범위하게 볼 수 있는 듯하다.   

이 '위기'는, 스트레스, 무료함, 육체적 에너지 저하 등을 해소하거나 새로운 바램, 진로 계획, 궤도 수정을 이루는 정도의 차원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의미'의 문제란 실존의 문제이며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영적 영역의 문제인 이 위기는 다른 한편으론 삶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이 '위기'는 하나님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인생을 의미하고 정의하는 '틀'이 근본부터 흔들리고 새롭게 정리되는 동안 그분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거짓된 자아와 잘못된 쳇바퀴로부터 벗어나 당신께로 마음과 발걸음을 진실하게 향하도록 이끄신다. 우리의 삶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은, 이 경우엔 목마름을 통해 우리를 깨우시고 실망을 통해 우리를 비우시며 실패를 통해 우리의 공허함을 드러내신다. 그래서, 스스로의 노력을 다 내려놓고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그럼 왜 이런 일이 하필 '중년기'에 일어날까? 

그것은 40세를 전후로한 중년기가 인생에서 가지는 특별한 위치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40세를 '인생의 정오'라고 할 때, '오전' 중엔 위로 상승 일변도이던 해가 이제 '오후'를 맞이하면서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상승에서 하향으로 바뀌는 시기는 하루중 단 한 차례 뿐이므로 이 때가 독특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오전과 오후는 하루 안에서 동일하게 중요하지만 서로 다른 법칙을 따른다. 오늘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실현해가면서 계속 확장되고 분주해져온 오전이었다 할지라도, 오후에는 하루의 종착점과 마무리를 염두에 두기 시작해야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삼십대에는 무엇인가를 성취하고자 갈망하면서 그것을 위해 자신의 인생이 표현되고 확장되는 일에 힘썼다면, 중년기 이후로는 점차로 선택과 올인과 집중이라는 키워드들과 진지하게 대면하기 시작한다.

때론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을 활용해서 적극적으로 사람을 위기와 궁지로 몰아넣기도 하시는 것 같다.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다다를 수 없는 지점에까지 이끌어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위기는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 다가오는 만큼 세상을 사는데 요긴했던 스킬이나 그동안 실천해온 익숙한 영적훈련 방식들은 더이상 큰 도움이 되지 못하기 쉽다. 익숙한 것은 잃었지만 아직 새로운 것은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전반적으로 흥미를 잃거나 방황할 뿐만 아니라 자칫 믿음마저도 내던지고 하나님께 등을 돌릴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의 모든 영적 노력을 거두어가시는 것은, 마음의 공허함과 적막함을 통해서 영혼 밑바닥으로까지 인도하심을 따를 수 있도록 우리를 비우기 위해서이시다. 그 과정은 종종 고통스럽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든 이미지로서의 하나님이 아닌 현존하시는 참된 그분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매우 가치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때문에 '비워지는' 일과 연관된 인생의 요구들은 중년기에 더욱 집중될 수 있다고 이해된다.

나의 경우에, 첫 '목마름' 이후부터 '위기' 과정의 본질과 목적을 알아차리게 되기까지는 2~3년의 시간이 걸렸다. 아직 본질도 목적도 알지못하는 동안 먼저 맞닥뜨린 것은 긍정적인 의미들이기보다는 부정적인 단면들, 즉 끈질기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잘못된 동기와 거짓된 모습들이었다. 그것들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고 이슈화되어 마침내 어떤 방식으로든 다루어질 수 있도록 준비되어온 것이 이 기간의 의미였다고 생각된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1)



참고) 영성가들 사이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이러한 면들에 관한 폭넓은 숙고와 이해가 존재해왔다는 점은 놀라운 사실이다. 영성적 고찰에 관해서는 요하네스 타울러(13세기 수도사/영성가), 심리학적인 면에 끼치는 종교적 영향에 관해서는 칼 융, 이 둘의 현대적 적용에 관해서는 안셀름 그륀, 그리고 그외 다수의 현인들(많은 경우 개척자적인)로부터 도움과 지혜를 얻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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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2 07:00

전환기 내면여정 (2) - 인생의 시기들

지금까지 살아온 평생의 시간들을 한 번 조망해 보았다. 

평생의 시간들이 일정한 간격의 싸이클을 가진 것으로 정리되고 또 그 안에 숫자적으로 딱딱 떨어지는 대칭적인 요소들이 있는 것을 보면 스스로 '너무 작위적인 생각을 한 것은 아닌가?' 싶은 마음도 든다. 하지만, 몇 년에 걸친 시간을 보낸 끝에 다다르게 된 이런 생각들을 처음 접하며 순수한 의미에서 경이로운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먼저, '영적 내면여정'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은 최근 5년은 다음과 같았다. 흔히들 '중년의 위기(midlife crisis)'가 발생하기 시작한다는 35세 때 이 여정을 시작해서 '인생의 정오'라는 40세까지 이 과정을 밟아온 것도 이제와서 돌이켜보면 어떤 분명한(나중에 다시 언급할)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첫 2년 - 내적 '목마름'의 실체를 정확히 모른 상태에서 '목마름'이 축적되어온 기간 
  • 그 후 1.5년 - 새로운 방향과 가능성에 눈뜬 후 '열정적'으로 달려갔던 'misfire'의 기간 
  • 최근의 1.5년 - 'depressive modes'와 함께해온 '정화과정' 기간   

한편, 이 '내적 struggle'로서의 '내면여정' 기간은, 지금 생각해보면,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난 직후 5년간 있었던 '외적 struggle'에 대응하는 기간이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이 둘을 아우르는 공통된 주제는 'surrender' 와 'His Way' 였다.
 
  • 외적 struggle (5년) - 학교 transfer, 전공 transfer, 졸업없이 직장으로 transfer  
  • 결혼 후 2년 - 위로의 시기 
  • 내적 struggle (5년) - 목마름, '어두운 밤', 영적 내면여정  

이 전체 기간이 12년 동안에 걸쳤던 것처럼, 인생의 다른 기간들 역시 대략적으로 12년을 주기로 하는 싸이클을 가져왔던 것이 무척 흥미롭다. 

  • phase 1: 최초 기억이 존재하는 만 4세 때부터 집을 떠나 살기 시작한 16세까지 ('9번' 유형) 
  • phase 2: 집을 떠난 후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 28세까지 ('3번' 유형)
  • phase 3: 예수님과 만난 후부터 '정화과정'을 거쳐 중년으로 넘어가는 40세까지 ('9번' 유형)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시 13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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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1 07:00

전환기 내면여정 (1) - 이제 조금 보인다!

작년 한해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서 우울증과 아주 흡사한 증상을 겪었다. 

담당의사는 'dysthymia'(완만하게 지속되는 우울증의 한 종류)라는 일찌기 들어보지 못한 이름의 병명을 소견으로 주었고, 심리치료가(psychotherapist)는 정확히 우울증은 아닌 것 같다며 'depressive mode'라는 명칭을 붙여주었고, 영적지도자(spiritual director)는 '정화과정(purification process)'을 거치고 있는 것 같다는 해석을 내려주었다.

증상은, 봄의 경우엔 온갖 감정들이(주로 슬픔과 감정적 무력감) 때로 감당키 어려운 레벨로 올라오곤 하는 것이었고, 가을의 경우엔 이성적 회의감, 분노, 만성피로, 몸무게 감소 등을 경험하였다. 특히, 뭔가를 시작하기가 무척 어렵고 때때로 집중과 판단에 어려움을 느낀 점들은 병리적 우울증과 매우 닮아있는 모습이었다. 가장 어려웠던 한달 동안은 매주 닷새를 쉬고 이틀씩만 일하기도 했던 만큼 나름 혹독한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일들은 독립적으로 따로 존재했다기 보다는 그 전부터 진행되어 오던 '내면여정' 프로세스의 컨텍스트와 연결된 것들이었다. 극심한 '목마름'으로 대변되는, 다시 말하면 '내적 struggle'이라고 부를 법한 이 '여정'의 시작은 정확히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5년의 시간 동안, '내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이 목마름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있는 것일까?' '이런 일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하는 등의 의문을 마음 속에 품고서 살았던 순간이 많았다. 그러던 것이 이제서야 처음으로 전체 그림이 어렴풋이나마 보이기 시작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아직도 일부 진행중인 면이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적어도 오랜시간 축적되어온 무언가가 이제 이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한 매듭을 지어가는 중이라는 정도는 점차로 확신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런 시점인 만큼, 지금까지 겪어온 '내면여정'의 의미와 목적과 그 구체적인 과정들을 한 번쯤 정리해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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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9 12:31

a spiritual breakthrough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겠느냐?"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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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8 12:49

life verses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시편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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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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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6 13:32

알아차림

알아차림은 그분과의 대화의 시작이고 본질이며
그 음성에 대한 진솔한 응답이다.

알아차림은 영혼의 치유와 발돋움과 참 섬김을 지향하는 유일한 길목이며
그분 닮은 사랑으로 빚어가실 정화의 과정 안에 주어진 나의 역할 그 자체이다.  

being mindful about mindfulness in the midst of su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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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7 18:45

에니어그램

처음엔
환경과 상황에 반응하는 다양한 메카니즘과 각 사람마다 다른 성향에 눈뜨는 과정이 흥미로왔고 insightful 했다. 

내 삶에 나타나는 특징과 반복성에 대하여 깨닫고,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자연스런 반응으로 나타나곤 하던 고유한 '해석 메카니즘'이 어떠한 것인지를 발견하면서
이를 통해 자기성찰을 이루는 거울로 조금이나마 삼을 수 있었던 면은 특별한 유익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제는
각기 다른 유형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에 많은 공통점과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더 amused 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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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2 19:30

용서에 관하여

T. Keating says...

"용서란, 모든이와 평화에 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모든이를 내 마음 안에 받아들이고 그들의 아픔과 기쁨을 내 자신의 것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열림'은 너무나 서로에게 가까운 것이기에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게 되며, 따라서 영적 여정은
개인적 수련에 머물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영적 여정을 시작할 때마다, 모든 인류와, 더 나아가서는 창조세계까지도 그 여정을
우리와 함께 나누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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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say...

용서는 현재가 더 이상 과거에 속한 어떤 것들에 의해 지배당할 필요가 없음을 말하는 '자유함'의 선언이다.
용서는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내 자신의 의도를 내어드리는 '현재진행형' 프로세스이다.
용서는 그 또한 나와 같은 연약한 죄인이라는 사실 위에 그분의 긍휼함으로 함께 덧입는 '공동체성'의 회복이다.
용서는 잃어버린 샬롬의 회복이며 그분의 부르심대로 걸을 수 있도록 방해물을 제거하는 '영적 초기화' 작업이다.  

(a review inspired by luckhee's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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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1 18:25

자유함에 관하여

자유함은 구원이다.
구원이란 말의 의미 안에는 인간 실존의 모든 제한과 갇힘으로부터의 해방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만드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죄도 아픔도 눈물도 죽음도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자유함의 속성을 가진 구원의 완전한 모습인 것이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순간은 구원하시는 그분의 속성을 배우며 체험케하는 은혜의 시간들이다.
어떠한 형태로든 제한됨의 결과로 나타나는 '고통'은 제한됨이 없으신 그분의 속성을 직시하게 만드는 특별한 은혜의 장치이다.

병든 몸으로부터, 힘든 인간 관계로부터, 경제적 어려움으로부터, 열리지 않는 앞길로부터, 풀리지 않는 어려움으로부터, 채워지지 않는 갈망으로부터, 이해되지 않는 생각의 한계로부터, 사랑없는 마음의 한계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라는 감옥'으로부터 자유케됨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매 순간 그분의 구원을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낀다.   

그런 만큼, 자유함은 목말라할 만한 가치이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귀중한 선물이다. 

그러나, 자유함이 귀중한 '과정'일지언정 그 자체가 궁극의 '목표'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또한 깨닫는다. 자유함만을 위한 자유함은 그 자체로 '제한된' 자유함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의 자유함은 어떤 것이었는가?

하나님의 충만하신 성품은 자유함이란 말조차 필요없을 정도로 이미 완전히 자유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 자유함의 속성은 스스로의 자유함을 내려놓을 수 있는 자유함이고 자유의지였다. 사랑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비울 수 있는 자유함이며, 섬김을 위하여 성육신할 수 있는 자유함이며, 다른이의 자유함을 위해 자신을 속박하는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함이었다. 곧 '자유함으로부터도 자유할 수 있는' 그런 자유함이었다.

나 자신의 '거짓 자아'라는 가장 '자유롭지 못한' 실존을 대면하고 나서야 자유함의 그 다음 단면을 가슴으로 엿보는 access를 얻는다는 사실에 경이로움과 humbled됨을 느낀다. 오늘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빌립보서 2:5-11의 'Christ Hymn'을 다시금 묵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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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0 09:58

죽음에 관하여

죽음의 가능성에 대면하여 서보았을 때
예상외로 두려움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예상하지 못했던 슬픔의 흔적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였음에 관한 것임을 알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죽음의 이유가 온전히 사랑뿐이셨던 주님의 매달리심 앞에 서서야 그것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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