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기울이기'에 해당되는 글 22건

  1. 2010.11.15 NYCP inaugural concert (10/2-3/2010) (2)
  2. 2009.03.27 [music]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명연주? (3)
  3. 2009.01.22 [music]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 - by Furtwangler & Berlin Phil. (1943) (4)
  4. 2008.11.19 [music] "St. Thomas" - by Sonny Rollins (1956) (3)
  5. 2008.11.05 [music] "Tea for two" - by Art Tatum (1933) (2)
  6. 2008.07.12 [music] Billie Holiday, "Fine and mellow" (1957) (2)
  7. 2008.06.19 Chuck Colson on Duke Ellington - "A jazz genius" (4/1999)
  8. 2008.06.19 [music] Duke Ellington, "Take the 'A' train" (1956)
  9. 2008.06.11 나는 왜 재즈를 좋아하는가?
  10. 2008.06.04 [music] Bach, "Liebster Jesu, wir sind hier" BWV 731- by Albert Schweitzer (1936)
  11. 2008.06.01 [music] "Blessed be the name" - by Mississippi John Hurt (1928) (1)
  12. 2008.05.23 Clifford Brown - a jazz musician most respected & loved by fellow musicians
2010.11.15 21:30

NYCP inaugural concert (10/2-3/2010)


10
주말 맨해튼의 장소에서 뉴욕 클래시컬 플레이어즈(이하 NYCP) 창립 연주회가 있었다. 음악가들이 직접 청중들에 다가간다는 취지를 바탕으로 여러 장소를 돌며 무료 공연으로 모든 연주회를 진행하는 그들의 연주 실험’이 이제 막이 오른 것이다.

NYCP
창단 동기와 관련해서 지휘자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음악을 듣기 위해 인근 공공도서관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던 어떤 노신사와 몇 번 마주치게 되었는데, 음악에 기울이는 순간 만큼은 마치 세상의 어떤 시름도 초월한 것처럼 보였던 그의 표정을 통해서 NYCP의 사명에 대한 영감을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였. 삶에 지친 이들을 음악으로 위로하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는 동기 하나되어 이제 이렇게 함께 무대에 젊은 연주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전해오는 신선한 감동이 있었다.

 

연주회를 위해 선곡된 곡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을 그들이 담아내고자 하는 생각과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해볼 있었다. 각각 개별적인 곡들의 합은 상호 유기적인 어떤 전체적인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되었는데, 요약하면, '젊은 음악''모차르트' (또는 '전통의 새로운 확장'), '음악에 대한 애정'  가지 키워드로 표현될 수 있을 것 같았. 그리고, 이는 다시 그들 스스로 정체성 및 지향점 연결되는 듯 보였다. 즉,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프로그램을 보는 그 자체로 그들의 출사표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쇼스타코비치의 “Two Pieces”(Op. 11) 제목 그대로 두 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가 평생을 흠모한 바흐의 푸가를 듣는 듯한 분위기로 시작하는 알레그로와 현대 아방가르드적 분위기의 스케르초가 재미있는 대조를 이룬. 약관 19세의 나이에 작곡가로서 인상적인 데뷰를 하게 만들었던 1 교향곡과 거의시에 작곡된 젊은 음악’으로, 곡을 통해 비로소 현대음악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몸담게 되었다고 친구에게 고백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제 자신의 음악세계를 펼쳐나가기 시작한 청년 작곡가의 기상이 녹아있는 곡을 자신들의 연주회 곡으로 선택한 NYCP 선택은 그 자체가 하나의 메세지처럼 다가왔.

 

번째 곡인 슈베르트의 바이올린을 위한 론도역시 작곡자의 나이 십대 마지막을 장식한  하나의 젊은 음악이다. 협주곡이 없는 슈베르트의 음악들 가운데서 드물게 협주곡 형태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는 듯한  분위기도 주로 멜랑콜리한 분위기가 많은 슈베르트의 작품들 가운데서는 드문 편이라고 볼 수 있다. 결코 유명세나 특별한 주목을 누리지 못하고 수줍게 숨겨져(?)있던 이런 작은 보물을 실제 연주를 통해 재발견하는 일은 즐거운 경험이다. 설득력을 가지고 빛을 발하듯 연주한 독주자의 기량이 돋보이는 연주였던 만큼 연주효과도 뛰어나서 청중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다.

 

번째 곡은 29세의 젊은 작곡가 클린트 로드햄이 NYCP 위해 작곡한 “Driving Music”이란 곡으로 이번 공연에서 초연되었다. 가장 미국적인 일상의 단면이라고 있을 장거리 운전에서의 여러가지 느낌과 무드의 반전을 음악으로 표현한 곡인데, 마치 베토벤의 대푸가처럼 여러 파트가 안에서 계속적인 진화와 진전을 이루는 형식이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의 아방가르드적인 분위기는 앞서 연주된 쇼스타코비치의 스케르초와도 연결되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런 재능있는 젊은 음악가의 음악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박수를 보내는 일은 시대를 살아가는 애호가들에게 영광스럽게 부여된 특권이자 책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았. 

 

마지막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였다. 이 곡과 동시에 작곡된 유명한 “1812 서곡”에 대해서는 작곡자 자신의 흥미로운 코멘트가 남아있다. 따르면,서곡 깊이도 얕고 안에 담긴 예술적인 가치도 적지만 세레나데’ 만큼은 마음 속에서 우러나온 감동으로 작품이라는 것이. 이전까지 개인적으로 익숙했던 곡의 연주 스타일은 대편성 오케스트라 버전이었는데, NYCP는 느리지 않도록 잡은 템포를 바탕으로 완급의 변화와 리듬감을 살린 소편성 해석으로 이전에 미처 알지못한 서정성과 발랄함을 맛보도록 도와주었다. 작곡자가 모차르트를 흠모하며곡을 했다고 언급한 사실을 고려하면, 그 느꼈을 감동은 어쩌면 이런 방식일 때 원형에 더 가깝게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휘자까지 합해서 14명으로 구성된 챔버 오케스트라의 장점은 오케스트라적 풍성함과 아울러 실내악적인 디테일을 함께 맛볼 수 있는 점이 아닐까 한. 공연의 장소는 상대적으로 잔향이 적은 현대적인 공간이었던 데에 반해 둘째 공연장은 공간이 크고 울림이 많은 유럽의 성당같은 곳이었다 장소에서 연주 같은 프로그램 곡들이 서로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 것은 그 자체로 흥미로왔지만, 거기에 더하여 소편성 챔버 오케스트라야말로  가지 상반된 공간적 여건에 다재다능하게 대응하기에 좋은 형태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도 흥미로운 체험이었. 잔향이 적은 곳에서는 오케스트라적 풍성함이 플러스가 되고 울림이 많은 공간에서는 반대로 실내악적 측면이 플러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양한 장소로 사람들을 찾아가게 NYCP에게 챔버 오케스트라라는 구성은 매우 적합한 형태라는 생각이 들었.

 

심리학자 융은 음악 안에 마음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음악이 영혼의 영역에 관련되어 있다고 믿는다. 음악에 담겨진 감동이 주저앉은 마음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 안에 담긴 생명력이 영혼의 터치와 치유로 이어지는 일들이 NYCP의 젊은 음악인들을 통해 이곳 저곳에서 많이 일어나게 되기를 바란다.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잔의 맑은 물'을 직접 선사하기 원하는 그들의 포부에 마음의 박수를 전한다. 나 또한 음악의 힘을 믿기에, 그런 소망들이 단순한 꿈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함께 기대도 해본. 더 나아가서, 내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순회공연도 성사되어 서부의 사람들도 찾아가는 젊은 음악’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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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7 22:28

[music]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명연주?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여파로 베토벤 9번 교향곡 연주 추천에 관한 질문을 몇 번 받았다. 워낙 유명한 곡이라 새롭게 할 말도 없고, 솔직히 그동안 들어서 안좋은 연주도 별로 없었지만, 요청에 대한 최소한의 성의는 가져야하는 바, CD들을 다시 꺼내 들어보기도 하고 인근 도서관에 가서 좀 더 빌려다가 들어보기도 하였다. 개인적으로 특히 좋았던 몇 연주들을 한번 리스트업해본다. (이 바닥의 진정한 전문가들께는 송구...)  
 
1. 푸르트뱅글러(Furtwangler)
 - 바이로이트 페스티발, 축제극장 오케스트라 (1951, 라이브, EMI), 또는
 - 루체른 페스티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1954, 라이브, Tahra)

요즈음엔 푸르트뱅글러 식의 해석이 예전과 같은 수준의 인정과 환영을 받지만은 않는 모양이지만, 어쨌든 이 곡에 관한한 그가 남긴 장대한 족적을 무시하고 지나갈 순 없을 것이다. 이 연주들을 두고서는 '압도적인 감동'이라고 환호하는 사람들과 '지나친 주관주의'라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공존한다. 중후하고 로맨틱한 독일적 해석의 대표적 모델이며, '죽은 악보에 숨결을 불어넣는' 해석의 중요성 및 관객과의 호흡에 기인한 즉흥성을 강조한다. 비판적인 요소는 대개 자의적이라 할만큼 주관적인(idiosyncratic) 해석과 그때그때 달라지기 쉬운(spontaneous) 템포 때문일 것이나, Gramophone 매거진의 한 평론가의 표현처럼 곡 전반에 "massive current"가 흐른다고 할 정도의 자기 완성도와 설득력있는 장대한 드라마가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클래식에 갓 입문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무렵 합창 교향곡 자체에 매료되게 만들어준 연주는 바로 푸르트뱅글러의 51년 버전이었다. 그런만큼, 이분의 연주에 깃든 열정과 완벽한 자기 음악으로의 소화는 마치 이 곡 연주에 있어서의 'archetype' 인 것처럼 느끼게되는 경향이 개인적으론 있는 편이다. 

2. 토스카니니(Toscanini)
 -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 (1952, 스튜디오, RCA)

토스카니니의 해석은 푸르트뱅글러와는 다른 축을 형성한다. 푸르트뱅글러가 자신이 재해석한 베토벤의 전형을 만들어냈다면 토스카니니는 '나는 죽고 내 음악 안에 작곡자가 산' 연주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래서, 솔티는 "아마 정답은 이 두 축 사이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는 말로 두 사람의 존재감을 모두 인정했다. 푸르트뱅글러가 이 곡을 자신의 음악으로 재창조하려 했다면, 토스카니니는 이와 정반대의 입장에서 오로지 작곡자의 의도에 충실한 'fat-free'식 어프로취를 취했다. (푸르트뱅글러가 hermeneutic 했다면 토스카니니는 exegetic 했다고나 할까?) 템포 역시 베토벤이 지정한 속도에 따랐다고 하는 만큼, 다른 연주들에 비하면 꽤 빠른 편이다. 완벽주의자, 순수주의자로 알려진 그의 성향을 다소 느낄 수 있으며, 비록 푸르트뱅글러와는 다른 방향으로부터의 접근이긴 하지만 열정, 집중력, 그리고 다이내믹함이란 측면에서는 서로 통하는 부분도 있다. 아마도 후대의 지휘자들에게 끼친 영향으로만 볼 땐 푸르트뱅글러 이상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해석은 카라얀을 비롯한 많은 근현대 연주자들과, 더 나아가서는 최근 20여 년간 한 흐름을 만든 정격연주(authentic/periodic performance) 전통과도 맥이 닿아있는 'prototype' 이라 할만하기 때문이다. 

3. 텐슈테트(Tennstedt) 
-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85, 라이브, BBC Legend)

텐슈테트는 구 동독 출신의 지휘자인 만큼 그의 대가적 면모에 비해 카라얀, 번스타인 같은 사람들보다는 훨씬 세간에 덜 알려져있는 편이다. 주로 말러 스페셜리스트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우연찮게 도서관에서 그의 합창 교향곡 연주를 빌려서 듣고는 예상치 못한 반가운 충격을 받게 되었다. '숨은 명연'이라고 부르고 싶은 이 연주에서 푸르트뱅글러의 드라마와 토스카니니의 열정 및 집중력을 고루고루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 두 축들 사이 어딘가에 있다"는 바로 그 '정답'들 가운데 하나가 아닐런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토스카니니보다는 푸르트뱅글러 쪽에 더 가깝긴 하지만..) 사실, 위의 두 노장들의 연주를 실제로 감상하며 '즐길' 수 있는지의 여부는 그들의 연주가 훌륭하다는 점과는 또 다른 문제이다. 반세기 전의 빈약한 모노 사운드가 귀에 전혀 거슬리지 않는 사람들만이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용한 거장' 텐슈테트가 LPO를 은퇴하기 2 년전에 한 이 말년의 연주는, 열정과 서정성의 조화 및 오케스트라와의 교감도 뛰어나지만, 거기에 더해 음질도 좋고 라이브의 열기까지 더해져 있어서, 처음 이 곡을 접하는 이에게 꼭 한 연주만 권하고자 하는 경우에 추천할만한 선택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연주가 끝났을 때 우뢰와 같은 박수를 치는 관중들이 부러워지게 만드는 실황연주이다.    

4. 카라얀(Karajan)
 - 베를린 필 (1962 & 1977, 스튜디오, DG)

카라얀이 남긴 베토벤 교향곡의 여러 연주 음반들 가운데서 대체적으로 위의 두 연주를 제일 쳐주는 모양인데, 대체로 3악장 아다지오는 77년 연주가 더 아다지오스럽고, 4악장의 보컬 파트는 62년 연주가 한수 위라는 평가이다. 개인적인 선택으론, 생동감과 긴장감이 살아있고, 베를린 필의 현악 파트가 마치 빈 필처럼 들리며, 4악장의 솔로와 합창단이 뛰어난 62년 버전을 좋아한다. 카라얀은 유명세 만큼이나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대표적인 지휘자인데, 그의 해석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유려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인공적인' 그의 스타일이 62년도 연주에서는 아직 나타나지 않는디. 뿐만 아니라, 매너리즘이 아직 보이지않는 가운데 오히려 신선한 측면들을 볼 수 있는 점도 62년 버전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푸르트뱅글러나 토스카니니 시대에 비하면 불과 10년 정도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그 사이에 이루어진 스테레오 녹음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놀라운 수준이다. 무난하고 구하기 쉬운 연주이다. 

5. 반트(Wand)
 - NDR 심포니 오케스트라 (1982, 스튜디오, RCA)

독일 후기 낭만파의 음악, 특히 브루크너의 권위자로 알려진 또 다른 '조용한 거장' 반트의, 역시 만년에 이루어진 이 연주도 독일적 해석의 계보 안에서 현대적 명연주의 반열에 오를만한 연주이다. 반트는 여러 레파토리를 많이 섭렵하기보다는 자신의 주요 레파토리를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연주, 녹음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하는데, 이 연주 만큼은 너무 만족스러워서 다시 이 곡을 녹음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반트와의 개인적인 인연으로는, 마음에 꼭 드는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연주를 아직 찾지못하고 있었을 때 그의 베를린 필과의 연주가 이 목마름을 완전히 해소시켜주었던 일이 있었다. 중후함과 섬세함을 조화시키는 그의 장기가 잘 발휘된 경우였는데, 여기서도 비슷한 그의 시그니처를 엿볼 수 있다. 한편, 이 연주는 퀄리티 측면 외에도, 상당히 저렴한 가격($5~7)에 구입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6. 벤스케(Vanska) 
 - 미네소타 오케스트라 (2006, 스튜디오, BIS)

북구 출신답게 원래 시벨리우스 등의 음악으로 이름을 날렸던 벤스케가 미국으로 이주해서 무명의(역사는 오래되었지만..) 미네소타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화제를 불러일으킨 베토벤 교향곡 싸이클의 일부이다. 마치 토스카니니 스타일의 현대판 버전인 듯한 느낌도 들며, 3악장의 메마른 느낌을 참을 수 없게 만들곤 하는 이전 정격연주들에 비해서는 한층 풍성한 느낌이다. 그러나, 명료하면서도 리듬감과 질감이 뛰어난 그의 연주의 진가는 역시 빠른 악장들에서 더 잘 나타난다. Jonathan Del Mar라는 음악학자가 십여 년간 옛날 악보를 대대적으로 수정하여 97년에 발표한 Barenreiter 에디션의 신 악보를 기초로 연주된 만큼, 합창 교향곡의 현대적 해석의 현주소가 궁금한 사람에겐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진만을 시작으로, 아바도, 노링턴, 래틀, 맥케라스 등 현대의 많은 연주자들이 이 악보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http://www.baerenreiter.com/html/lvb/index.html 참조)  한편, SACD 겸용인 이 씨디는 음질이 매우 중요한 이슈인 audiophile들에게서 선호될만한 선택이기도 하다.
그 외, 합창 교향곡의 매력에 처음으로, 또는 다시금 빠져들게 할만한 영상물 두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는, 역시 '베토벤 바이러스'이다. 전체 드라마의 중간 쯤에 나오는 두 번째 연주회에서 이 곡이 연주되는데, 이 곡에 대한 관심을 새로와지게 만드는 '비쥬얼의 힘'이 있는 것 같다. 특별히, 인생의 스토리들이 음악적 내러티브에 새로운 호흡을 불어넣는 설정이 나름 음악적 인사이트를 강화시켜주는 면이 있었다.

두번째는, Ed Harris가 베토벤으로 나오는 'Copying Beethoven'이다. 스토리 자체야 픽션이지만, 음악을 중심축으로 해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점에 대해서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일종의 감사한 마음마저 들게 한다. 여기서도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합창 교향곡이 주요 부분 발췌의 형태로 전곡 연주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음악의 각 부분부분에서 등장인물들이 서로 교감하는 모습이 이 곡에 대한 새로운 감흥을 불러 일으켜준다.  


(revised, 3/29, 1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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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2 23:42

[music]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 - by Furtwangler & Berlin Phil. (1943)

베토벤은 음악가로서 치명적인 청력 상실의 고난과 싸우며 불후의 명작들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작곡자이자 피아니스트로서 원래 연주방면으로 보다 많은 활동을 하고있던 그가 훗날 작곡에 '전념'하게 된 것도 어쩌면 이런 고난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선배 작곡가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그만의 '장르'를 개척할 뿐만 아니라 곡들 자체의 깊이에도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나는 그의 'Middle Period'의 시작점이 청력 상실이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는 시기와 오버랩된다는 점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운명'으로 더 잘 알려진 5번 교향곡과 6번 '전원' 교향곡은 그의 청력 상실이 본격화되어가는 시점에 착상되어 거의 같은 시기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처럼 서로 전혀 상반된 분위기의 두 곡을 동시에 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다는 점으로부터도 당시 그의 내면에서 겪고 있었을 감정적 동요와 굴곡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7번 교향곡은 그가 더이상 아무 것도 들을 수 없게 된 시점인 1812년에 작곡되었다. 완전한 청력 상실이 이제 현실로 다가온 시점에서 쓴 첫 곡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곡은 전반적으로 밝고 역동적인 느낌을 주지만, 2악장에서 만큼은 그의 마음 깊은 곳에 흐르고 있었을 절제된 아픔과 슬픔에 대한 단상을 숨기지 않고 보여준다. 최근의 "베토벤 바이러스"나 예전의 "Mr. Holland Opus" 같은 드라마/영화를 보면 등장인물이 청력을 상실하는 장면에 이 2악장의 선율이 흘러나오는데, 이러한 곡의 배경을 생각하면 매우 적절한 선곡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세기의 연주가들 가운데 베토벤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의 하나는 단연 지휘자 푸르트뱅글러이다. 그는 레코딩 및 라디오 기술의 태동과 시대를 같이하며 '수퍼스타 지휘자' 시대의 문을 연 사람으로 기억되기도 하지만, 그의 생을 이야기할 때 나치 독일 치하에서 겪은 고난과 영욕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 점은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일찌기 30년대 초부터 나치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었다. 유태계 작곡가 힌데미스의 곡이 금지 처분되었을 때에는 맡고있던 여러 자리로부터 사임하기도 하였다. 그의 망명설이 흘러나오면서 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국으로부터 상임 지휘자 제안이 밀려들기도 하였지만, 막상 전쟁이 일어나고 나치의 잔혹성이 만천하에 드러나기 시작하는 때에 그는 오히려 본국에 머물 것을 결정하였다. 이를 두고 한편에서는 '자기 조국으로의 망명'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였고, 다른편에서는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나치의 선전에 활용된 면을 들어 그의 본국체류 결정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물론 나치 협력에 관하여 그에 대해 이루어진 모든 고발은 전후에 벌어진 재판 및 심사 과정에서 모두 무혐의로 선언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유대인 음악가들을 숨겨주고 탈출을 도왔던 사례들이 후에 알려지기도 하였다. 종전 직후에 예후디 메뉴힌과 같은 유태인 음악가들이 종종 그와 협연한 사실은 많은 유태인들이 심정적으로 그를 지지했음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오히려 그는 나치의 지배하의 조국에서 마음속으로 울고 있었던 듯하다. 그가 종전 재판 과정에서 한 말을 들어보자.
 
"독일은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었고, 나는 독일 음악에 대해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이 위기 상황에서 가능한 한 살아남는 것이 나의 임무였습니다. 나의 음악이 (나치의) 선전에 오용될 수 있다는 우려는, 독일인들에게 주어진 음악을 지켜야만 한다는 더 큰 우려 앞에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바하와 베토벤, 모짜르트 및 슈베르트와 같은 혈통을 지닌 이 사람들은 이제 전면적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힌 정권의 컨트롤 아래에서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이 상황 안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그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 판단할 수 없을 것입니다...

'히믈러(유태인 대량 학살의 기획/실행자)의 독일' 치하에선 베토벤 음악이 연주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히믈러의 공포 아래에 살고있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자유와 인류애라는 베토벤의 메세지에 그 누구보다 더 필요와 갈망을 느끼는 사람들이 아니었겠습니까? 나는 그들과 함께 머물기로 했던 일에 대해 후회하지 않습니다."

(from Wikipedia; "The Furtwangler Record" by John Ardion)

여기에 링크된 연주는 1943년도 베를린필의 전용 연주회장에서 이루어진 연주 실황녹음이다. 당시 나치는, 지휘자를 체포하겠다, 교향악단을 해체하겠다, 연주자들을 모두 군대에 보내겠다, 하는 식으로 협박과 회유를 반복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43년 당시는 또한 유태인들이 수용소에서 본격적으로 죽어나가고 있는 시점이었으며, 그럼에도 나치 독일은 아직 유럽의 여러 곳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형통함'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 '악인'이 다름아닌 자신의 나라라는 자괴감, 그리고 자신들 각자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 등이 아마도 복잡하게 연주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본 연주가 이루어진 베를린필 전용 연주장은 몇달 후인 44년 1월에 폭격으로 완전히 무너지게 될 만큼 그들은 전화의 한 가운데에 서있었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이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현이 울고있는 듯한 환청에 잠기며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한다.  

이 연주에 대한 고난은 작곡자와 연주자들의 것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45년에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은 이 녹음 마스터를 포함한 베를린필의 연주녹음 테입들을 모두 소련으로 압송해갔다. 테입이 본 주인들의 손에 되돌아오기까지는 앞으로 공산주의가 몰락하는 데 걸려야할 40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렇듯 본 연주는 한 시대와 인간의 실존적 고난에 대한 여러가지 방향의 증언을 담고 있다.  

이 음악을 들으면 늘 떠오르곤 하는 한 사람이 있다. 이 음악이 연주되고 있을 같은 무렵 같은 독일 땅 어딘가에서 차가운 감방에 갇힌 채, 안으로는 "나는 누구인가?" 고뇌하고 삶으로는 '그리스도의 사람'다운 양심과 온화함을 몸으로 보여주던 디트리히 본회퍼가 바로 그이다. 그 또한 모든 망명 제의와 권유를 뿌리치고 "그들과 함께 고난의 현장에 있기 위해" 동포들이 있는 독일로 다시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피아노에 능했던 그도 음악을 무척 사랑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푸르트뱅글러가 말하는 '자유와 인류애'의 메세지가 그 이상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작곡도 연주도 녹음도 모두 어떤 '이야기'들을 담고있기에 우리에게 오늘날 또 다른 이야기를 불러일으켜주는 이러한 연주야말로 '인류 문화유산'이라고 불러지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실존적 고난의 현장 한 가운데에서 자신들의 마음을 노래했고 다른이를 위로해온 음악이었기에, 오늘날 고난의 현장에 서있는 이들에게도 이 음악은 그들의 상한 마음과 영혼을 어루만지는 손으로서 동일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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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9 00:05

[music] "St. Thomas" - by Sonny Rollins (1956)

소니 롤린스는 50년대 초부터 현재에 이르도록 활동을 계속해오고 있는 최장수 재즈 뮤지션의 한명이다. 지난 여름에도 80을 바라보는 고령의 나이로 이곳 베이지역에 와서 연주를 하고갔다. 
 
오랜 커리어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50년대 중반에서 60년대 중반에 이르는 10년 동안의 연주들이 워낙 찬사를 독점하다보니 이후의 시기는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같은 기간 동안 테너 섹소폰 계를 양분하다시피한 존 콜트레인이 끊임없는 변신을 이루면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던 것을 고려할 때, 그의 경우는 일찌감치 창작력의 탄약이 고갈되어 조로 현상을 나타낸 것처럼 비교되기도 하였다.  

콜트레인의 경우는 사실 전례가 없을 정도로 '100미터 달리기' 식의 스타일을 보인 커리어였다. 하드밥에서 모드음악으로, 아방가르드에서 발라드와 다시 프리재즈로, 2~3년 사이마다 그의 음악 스타일은 그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졌다. 그뿐만 아니라, 10년 동안 활동한 것 치고는 실로 수많은 음반(또는 음원)을 남겼다. 후대의 팬들과 음악인들은 이러한 그의 구도자적인 dedication에 아낌없는 존경을 보냈지만, 40세에 때이른 죽음을 맞이한 것에는 사실 과로사의 의미도 적지않았다고 이야기되기도 한다. 

이에 반해, 롤린스의 경우는 철저한 '마라톤' 스타일이었다. 그는 연주와 창작활동을 하다가 영감이 고갈되면 몇년 동안 잠적했다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는 일을 반복했다. 그의 길디 긴 커리어는 그러한 재충전이 없었다면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콜트레인이 '짧고 굵게' 살다 갔다면 롤린스는 상대적으로 '가늘고 길게' 살았다고나 할까? 아뭏든, 한 시대를 상징한 두 사람은 이렇듯 다른 두 가지 삶의 방식의 강렬한 대조를 보여준다. 

"St. Thomas"는 1956년 앨범 "Saxophone Colossus"에 실린 그의 대표곡이자 카리브해의 칼립소 리듬을 도입해서 하드밥으로 소화한 명곡으로 유명하다. 색소폰도 훌륭하지만, 그의 단짝이자 당대 대표 드러머의 한 사람이었던 맥스 로취가 마치 정교한 붓으로 수채화를 그리듯 만들어내는 드럼의 조형미 또한 대등한 솔로 악기로서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하다. 그들의 젊은날이 함께 빚어낸 욱일승천하는 듯한 창작력의 기개는 50년의 세월을 넘어 동일한 신선함을 전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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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5 06:36

[music] "Tea for two" - by Art Tatum (1933)

Art Tatum은 미국 재즈 음악의 비교적 초창기인 30 년대에 등장하여 클래식, 스트라이드, 스윙, 부기우기 등의 장르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음악 스타일을 선보인 아티스트이다.

빠른 손놀림과 정확한 박자 감각, 그리고 동일한 곡이지만 코드 진행의 변화를 주어 독특한 느낌을 주는 방식의 화성 응용법으로 유명했는데, 이는 40 년대 비밥/모던재즈 혁명의 주역들에게도 큰 영감이 되었다. 그의 영향력은 특별히 아티스트들에게 더욱 커서, 모던 재즈의 꽃이 만개한 50 년대 중반에 한 잡지사에서 현역 재즈 아티스트들에게 "가장 영향력이 큰 재즈 아티스트는 누구인가?" 하고 설문을 하였을 때 2/3가 그의 이름을 언급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창조적 음악성과 실력은 클래식 음악의 대가들에게도 정평이 나있어서, 토스카니니, 호로비츠, 루빈스타인 등 당시 뉴욕에 살았던 음악가들도 그가 연주하는 클럽을 즐겨찾곤 했다고 한다.

이러한 그에 대하여, 재즈 음악 씬에서 그 자신 가장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인 오스카 피터슨, 데이브 브루벡, 테디 윌슨이 한 이야기들을 들어보자 (from wikipedia):  
   
 오스카 피터슨 - "If you speak of pianists, the most complete pianist that we have known and possibly will know, from what I’ve heard to date, is Art Tatum."

 데이브 브루벡 - "I don't think there's any more chance of another Tatum turning up than another Mozart."

 테디 윌슨 - "You get all the finest jazz pianists in the world and let them play in the presence of Art Tatum. Then let Art Tatum play ... everyone there will sound like an amateur."

그는 흑인으로 거의 눈이 실명된 상태에서 태어났으며, 거의 독학으로 피아노를 공부했다고 전해진다. 장로 부부인 부모 밑에서 어릴 때부터 교회 음악을 접하며 자라난 것이, 척박한 조건이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일어설 수 있도록 하는 정신적인 힘이 되어주지 않았을까? 아마도 남보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 자신의 음악을 세워나갔기에 거꾸로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할 수 있었을 것이다.

"Tea for two"는 1933 년에 녹음한 그의 첫 데뷔 녹음 4 곡의 하나로, 당시 잘 알려진 곡을 그의 스타일대로 jazzy하면서도 classical한 멋이 풍기도록 편곡한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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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2 14:02

[music] Billie Holiday, "Fine and mellow" (1957)



빌리 할리데이는 참으로 드라마틱한 삶을 산 재즈 보컬리스트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엄마는 불과 열세 살의 '철부지' 소녀였고, 그의 아빠는 몇 년 동안의 동거기간 후에 곧 가족들을 떠나는 "무책임한" 열여섯 살 십대 소년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할렘에서 엄마와 함께 먹고살기에 급급한 하루하루를 살면서 마약, 매춘, 폭행, 감옥생활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가수로서 성공하고난 후에도 남편(들)로부터의 abuse와 마약중독에 시달리곤 했다. 아마도 1920~30 년대의 미국에서 가난한 흑인 여성으로 살았던 많은 이들이 그와 비슷한 연약함과 고단함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Fine and mellow"는 질곡의 삶을 살았던 그가 남긴 몇 안되는 자작곡의 하나로, 그 자신의 삶을 전통적 블루스-재즈의 틀 안에 있는 그대로 담아낸 투명한 자전적 고백이다. 여기에선 그 자신이 겪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쏟아내는 사랑받고픈 자의 목마름과 좌절감이 삶의 육성으로 묻어나온다.  

 "My man don't love me, he treats me, oh, so mean...
  But when he starts in to love me, he's so fine and mellow."

 "Love will make you drink and gamble, make you stay out all night long.
  Love will make you do things that you know is wrong."

 "Treat me right, baby, and I'll stay home everyday..
  But you're so mean to me, baby, I know you're gonna drive me away."

 "Love is just like the faucet. It turns off and on.
  Sometimes when you think it's on, baby, it has turned off and gone."

건강 악화로 1959년 44세의 나이에 노환에 가까운 건강 상태로 생을 마감한 그의 '50 년대 performance에는 많은 이들의 호불호가 엇갈린다. 한창 때와는 크게 비교될 정도로 피폐해진 목소리와 기력 때문에 '40 년대 결과물들에 비해 음악적으로 뒤쳐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메마르고 연약한 목소리를 상쇄하는 더욱 풍성해진 표현력과 empathy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인생의 매 시점마다 '그 자신'이었다는 면에서 모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편, 이 곡은 전통적인 '12-bar 블루스'(열두 마디가 한 코러스를 이루어 기본단위를 구성하는 형태의 블루스)의 형식과 내용적 틀에 충실한 곡으로, 여기서의 연주는 각각의 연주자들이 기본적으로 한 코러스(i.e. 12 마디)씩을 담당하는 형태로 반복된다.

 A1  /  B1 - B2
 A2  /  B3 - B4
 A3  /  B5 - B6
 B6'  /  A4 - A4'

(A는 빌리 할리데이가 담당하는 보컬 파트를, B는 각 솔로악기를 맡은 연주자들의 즉흥연주를 가리킨다.)
 
 B1 -  Ben Webster (tenor saxophone)
 B2 -  Lester Young (tenor saxophone)
 B3 -  Dick Dickenson (trombone)
 B4 -  Gerry Mulligan (baritone saxophone)
 B5 -  Coleman Hawkins (tenor saxophone)
 B6 & B6' -  Roy Eldridge (trumpet)  <-- 아마도 노장을 우대한 듯...

이 비디오 클립은 CBS의 1957년도 TV 기획물인 "The Sound of Jazz" 프로그램에 실린 한 부분으로, 이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드문 라이브 재즈 영상물들 가운데서 첫 손에 꼽히는 '보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연주자 한명 한명은 재즈의 역사를 통틀어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가들로, 그들의 이름을 듣고 그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전율(?)을 느낄 재즈 애호가들이 많을 것이다.

듀크 엘링턴 밴드와 카운트 베이시 밴드에서 활약했던 소위 '3대(?) 색소폰 거장' 벤 웹스터, 레스터 영, 콜맨 호킨스와 '쿨 재즈'의 선봉장 제리 멀리건, 스윙 시대의 대표 주자라고 할만한 트럼펫의 로이 엘드릿지와 드럼의 조 존스... 올 스타를 모아놓았다고 해서 그 결과도 꼭 최고라는 보장은 없지만, 이 연주의 경우는 올 스타가 모여 만들어낸 명연주라는 면에서 어쩌면 흔치않은 예라고도 볼 수 있다.  

특히, 여기에 나오는 빌리 할리데이와 레스터 영은, 같은 해에 생을 마감한 그들이 죽기 2년 전의 모습들로, 두 사람 모두에게 있어서 이 하나의 기록만으로도 후세에 훌륭한 재즈 뮤지션으로 기억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백조의 노래'를 선보이고 있다. (이 둘은 당시 서있기 힘든 건강상태 때문에 앉아서 연주하도록 배려되었다.)  빌리의 보컬은 다른 악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당당한 하나의 '악기'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모두의 즉흥 연주가 탁월한 가운데에서마저도 군계일학처럼 빛나는 레스터 영의 연주는(두 번째 솔로) 어떤 한 평론가의 다소 열광적인 표현에 따르면 "한 번만 들어도 DNA에 새겨지듯 기억되는" 명연주이다. (And he adds, "Lester Young stole the whole show with that 38 seconds!" - Ken Burns documentary "Jazz")  20 년간이나 함께 연주해온 레스터로부터 지금 막 펼쳐지고 있는 이 연주가 어떤 의미인지를 빌리는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기쁘게 반응하는 그의 얼굴을 이 비디오에서 볼 수 있는 점도 잔잔한 감흥을 주는 대목이다.    

인생의 무게가 실린 음악...
화려하고 상업적인 음악의 홍수 속에서 한 잔의 '마실 물'을 찾기란 요원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 시대이기에, 자신들의 삶의 질곡과 고난의 한 가운데에서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를 붙잡듯 붙잡은 결과물이었던 '그들의' 음악은 흑백 영상에 담긴 빈약한 사운드이건만 오늘날에도 시공을 초월한 어떤 메세지들을 더욱 힘있게 전달해준다.

흔히 재즈는 '자유'의 음악이라고들 한다. 
그들은 struggle하였고, 자유로운 영혼을 노래하고자 하였으며, 그래서 때로 '음악'이라는 이름의 '진주조개'를 잉태하기도 하였지만, 과연 한 '인생'으로서 그토록 갈망하던 참 자유와 참 사랑을 끝내 맛보았을까? 그런 생각에 더욱 인간적이고 마음이 울릴 수 밖에 없는 '삶의 testament'로서의 그들의 음악..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솔직하였고 치열하였기에, 그들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담아 만들어낸 이 '흑인 음악'은 인간사의 한 위대한 다큐먼트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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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9 23:33

Chuck Colson on Duke Ellington - "A jazz genius" (4/1999)

A JAZZ GENIUS
The Music of Duke Ellington

By Chuck Colson
4/29/1999

Today marks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birth of Duke Ellington, one of the giants of twentieth century music. Few would contest the claim that Ellington contributed more to the development of jazz music than anyone else who ever lived. But there is one thing about him that is not widely known: his abiding Christian faith.

Ellington was raised in a deeply Christian home. Every Sunday his mother took him to at least two church services, and she frequently told her son that he was blessed and that God would take care of him. The Duke never forgot those early lessons.

As a young man, Ellington immersed himself in the Scriptures. A friend from Ellington's early days in Washington, D.C., recalled how the musician would often come home after a performance and read the Bible while taking a bath, and continue reading until the water turned cold. Ellington was meticulous about saying grace before meals, and he once wrote that "the greatest thing one man can do for another man is to pray for him."

During his middle years Ellington was not exactly a model Christian. He was thought to be somewhat of a womanizer, and he didn't attend church regularly. But according to biographer James Lincoln Collier, "there can be no questioning the sincerity of his religious feelings."

It was in 1965 that Ellington made his deep faith public. That year he was commissioned to do a liturgical composition for the inauguration of San Francisco's Grace Cathedral. This work, the first of three sacred concerts, signaled a permanent change for Ellington.

"This music," he declared, "is the most important thing I've ever done or am ever likely to do. This is personal, not career. Now I can say openly what I have been saying on my knees."

The centerpiece of this concert from Duke Ellington: A Concert of Sacred Music from Grace Cathedral is a 15-minute piece entitled "In the Beginning God." There was also an a cappella version of the Lord's Prayer, and the closing number, featuring famous tap dancer Bunny Briggs, is called "David Danced Before the Lord with All His Might."

From then on Ellington saw himself as "God's messenger," and he dedicated his last years to serving God through his music, writing three sacred concerts before his death in 1974.

The reception to these works was mixed. Some religious people thought jazz inappropriate for praising God. And many jazz musicians thought praising God inappropriate for Duke Ellington.

When people complained that Ellington's third sacred concert was taking too long to complete, Ellington defended his meticulousness, saying "You can jive with secular music, but you can't jive with the Almighty."

Ellington joins other musical giants like Bach and Mendelssohn as geniuses who sought to serve God through their music. Music historians rarely mention Ellington's faith but you and I ought to reclaim cultural heroes like Duke Ellington and proclaim the truth about his beliefs.

Why not celebrate the Duke's birthday today by purchasing his sacred concerts. Listen to them with an unsaved friend who likes jazz. After all, God has never been praised in quite the same way... before or since.


Copyright (c) 1999 Prison Fellowship Ministries (http://www.breakpoin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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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9 02:59

[music] Duke Ellington, "Take the 'A' train" (1956)

그 유명한 듀크 엘링턴의 "Take the 'A' train".
56년 Newport 재즈 페스티발에서의 실황 연주이다.
충분히 흥겹고, 음악적으로 세련미가 있으며, 라이브 연주의 분위기도 한껏 살아난 스윙재즈의 명곡이다.

그가 작곡하여 연주한 곡이 천 곡이 넘을 정도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지난 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대표 작곡가의 한 사람이었지만, 막상 그 자신의 signature tune으로 알려진 이 곡은 그와 평생을 같이하며 음악적 파트너쉽의 롤 모델을 함께 세웠던 빌리 스트레이혼의 작품이다.
경제 공황의 여파와 세계대전으로 인해 고단해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희망을 제시하고자 했던 시대적인 분위기 가운데서 작곡되었고, 낙관주의가 흐르고 있던 50년대 미국의 컨텍스트 가운데서 연주되었다.

음질과 스타일의 한계를 넘어 '음악의 에센스'에 귀기울여보면 누구든 쉽게 매력을 발견할 만한 accessibility가 있다.


cf. 'A' 라인은 할렘으로 들어가는, 당시에 신설된 뉴욕 지하철 노선이다. 한편, 할렘에는 오랜 기간 동안 그의 빅밴드와 함께 정기적으로 연주했던 카튼클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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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1 14:09

나는 왜 재즈를 좋아하는가?

1. 흑인들의 삶의 무게가 실린 음악이다.
- 억압받고 고단하고 가난했던 흑인들의 삶의 애환이 담겨있다. 억압받는 사람들의 정서가 절대자를 바라보게 하는 마음과 결합되어 나온 가스펠을 기반으로 하여, 블루스와 재즈가 발전되었다. (블루스 또한 재즈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재즈에서 관악기들이 주류를 이루는 이유도 뉴올리언스에 해군기지가 폐쇄되면서 버려진 군악대 악기를 흑인들이 쉽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즈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50~60년대에 녹음된 Prestige, Blue Note 레이블의 명반들 대부분이 그저 불러주는 곳으로 달려가는 세션맨들이 한두 번 정도의 리허설만 허락받은 상황에서 만들어낸 것들일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건 가운데 이루어졌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는 사람의 역량에 의존하는 의존도가 클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표현하는 음악에도 그래야만 하는 어떤 필연적인 이유들이 담겨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만큼 가식적이지 않은 인간의 솔직담백한 아우성과 풋내가 묻어나는 진솔한 음악이기가 쉬웠다. (그런 면에서, 재즈의 현대적 이미지가 중산층 이상이 즐기는 칵테일바/와인바 분위기의 음악으로 자리잡히게 된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라고 말할 수 있다.)

2. 함께하는 음악이다. 
- 재즈는 아주 드물게 독주가 있을 뿐 기본적으로 앙상블 음악이다. '상호 의존적'인 즉흥 음악인 만큼 밴드의 모든 구성원들이 거의 '동등하게' 중요하며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강한 신뢰'를 가져야 마음놓고 즉흥 연주를 펼쳐가는 것이 가능했다. 솔로도 돌아가면서 하고, 팝이나 록 등 다른 장르에 비해 베이스, 드럼 주자도 밴드의 리더가 되는 데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유명한 밴드 리더들 가운데, 아트 블레이키와 맥스 로취는 드럼 주자, 찰스 밍거스와 데이브 홀랜드는 베이스 주자들이다. Serving하는 악기/연주자와 served되는 악기/연주자가 따로 존재하는 음악이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 마일스 데이비스의 제 2기 quintet의 경우, '리드악기'(관악기) 주자들은 같은 음만 계속 연주하면서 철저히 곡의 백업을 맡고, 통상적으로 '리듬악기'인 베이스와 드럼이 곡의 진행과 솔로를 주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현대 식의 신자유주의적 경향으로부터 가장 역행하는 음악 장르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소편성 밴드를 중심으로한 50~60년대 류의 재즈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3. 인간 의식을 반영한 음악이다.
- 왕년의 소프라노 색소폰 주자 시드니 베셋에 의하면, 즉흥연주는 흑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이 감정을 느끼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고 한다. 백인성을 탈피해서 흑인성의 존엄함을 음악적으로 실현하고자 한 노력이 발견된 방식과 예는 허다하다. 백인 구매자들이 좋아하는 멜로디와 춤곡 위주의 상업적인 음악에 반발하여 예술성을 추구하고 화음과 박자를 세분화하여 그 변형의 지경을 끌어올린 것(찰리 파커의 bebop), 아프리카의 poly-rhythmic 패턴으로 백인/서구의 리듬 구조의 틀을 벗어나고자 한 것(아트 블레이키의 hard bop), 모드를 사용하여 백인/서구의 화성 구조의 틀을 벗어나고자 한 것(마일스 데이비스의 "Kind of blue"), 연주자의 즉흥성과 창의성을 가지고 박자와 화성의 제한으로부터 거의 완전히 탈피하고자 한 것(오넷 콜맨 등의 free jazz), 존 콜트레인이 상투적인 스탠다드 멜로디들을 해체하여 재구축하고 구도자적인 예술성을 추구했던 것("Giant steps," "My favorite things," "A love supreme"), 등... (이런 면에선, 현대에 유행하는 smooth jazz류의 음악들은 상대적으로 거의 '아무생각 없는' 음악인 것처럼 들린다...)  흔히 재즈의 코드는 '자유'라고들 이야기한다. 그들의 이 '자유 실험'이 어떻게 성공하였고 어디서 왜 한계에 봉착하거나 실패하였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음악에의 적용뿐만 아니라 인간의 추구와 반응과 그 결과로 만들어지는 삶의 모습에 관해서도 많은 insight을 제공한다.    

4. 열린 음악이다.
- 재즈의 본질은 애초의 태동기 때부터 퓨전이었다. 아프로-아메리칸의 리듬감과 웨스턴 음악의 화성적 틀이 결합하여 근간을 이룬 음악으로 발전한 것이다. 초기 발전 과정에서 흑인과 유럽/프랑스인의 혼혈인 크레올(예: 듀크 엘링턴)들이 이 음악을 주도한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재즈는 이미 이룬 것에 타협하지 않고 'Next!'를 추구하는 뮤지션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변형 및 발전을 이루어왔으며, 다른 장르로부터의 학습 또는 다른 장르와의 결합이 그 수단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드뷔시 등 인상파 음악가들이나 스트라빈스키, 바르톡 등 현대음악가들뿐만 아니라, 쿠바, 브라질, 인도, 동구 유렵의 음악으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으며, 90 년대 이후 음악계의 특징 중 하나로 나타난 '월드 뮤직'의 전형을 모드 음악, 보사노바 등의 형태로 수십 년 전에 이미 제시하였다. 이는, 미국 문화의 두드러진 특성이자 그들이 지난 세기 끊임없이 생동감을 유지하는 비결이었던 면들과도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 그런 면에 관해서도, 재즈를 가리켜 "the American music"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당히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5. 나름대로 예술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음악이다.
-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많은 뮤지션들이 화성의 한계를 추구하고 리듬의 한계를 추구하였으며 지속적으로 실험하였고 음악에 헌신했다. (그렇기에 클래식을 이해하려면 작곡가들을 짚어가야 하고, 재즈를 이해하려면 연주자들을 짚어가야 한다.) 자기 장르 안에서 음악적 한계치에 이르도록 예술성을 추구한 음악의 예는 사실 그리 많지는 않다. 이것이 내가 그 큰 스타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클래식과 재즈를 동시에 좋아하는 이유이다. 사실 이 두 음악에 헌신했던 음악가들 사이에서는 서로의 영역에 깊은 관심을 보인 이가 많았다. 쿨 재즈나 빌 에반스 식의 피아노 트리오는 클래식 음악의 영향을 깊이 받은 것이다. 한편, 스트라빈스키나 바르톡같은 이는 재즈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당대의 지휘자 토스카니니, 피아니스트 호로비츠 등이 살고있던 뉴욕은 또한 재즈의 본거지이기도 했는데, 이들은 할렘에서 태어난 가난한 맹인으로서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채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워 자기 스타일의 음악을 개척한 아트 테이텀 같은 이가 연주하는 클럽을 즐겨찾고 칭송한 팬들로도 알려져있다. 그러나, 자유와 음악성을 추구하고 그 스트레스로 인한 돌파구를 찾는 과정에서 많은 뮤지션들이 마약중독에 빠지거나 자신을 망친 사례가 적지않았던 것은 또한 인간의 가능성에 수반하는 한계성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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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4 00:50

[music] Bach, "Liebster Jesu, wir sind hier" BWV 731- by Albert Schweitzer (1936)

슈바이처 박사는 의사, 인류학자, 신학자로서, 자신의 삶으로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에게 헌신했을 뿐만 아니라
구미의 수많은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좋은 동기로' 아프리카를 향하도록 만들었던 실천적 지성으로 잘 알려져있다.

그에 비해,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가 또한 당대에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 오르가니스트였다는 점이다.

그는 매일 아침 이른 새벽에 교회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서 바하의 곡을 오르간으로 연주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강요함이나 서두름 없이 원주민들의 영혼을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가꾸어 주겠다는 의도에서였다.

그의 30년대 바하 곡 연주 음반들은 지금까지도 전해오는 '인류의 문화유산'인데, 작품번호 731번 코랄전주곡
"Liebster Jesu, wir sind hier" (Beloved Jesus, We are Here)는 그 가운데서도 백미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연주 & 녹음: 1936년)

클래식에 큰 흥미가 없더라도 들으면 느낄 수 있도록 '큰 사랑'과 '영혼의 고귀함'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이 곡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의 마음 또한 훈훈하게 적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최고의 작품, 최고의 연주이다.

오늘날 쉽사리 찾아보기 어려운, 참 인간의 '영혼'과 '정신'의 무게가 담긴 음악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런지...


('소개한 이'를 능가하여 appreciate하는 '소개받은 자(SJ)'와 이 유산을 함께 누림에 감사...!)



[##_Jukebox|ik0.mp3|02 BWV731 いと愛しまつるイエスよ、我らここに集いて.mp3|autoplay=1 visible=1|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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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1 00:03

[music] "Blessed be the name" - by Mississippi John Hurt (1928)

그에게 있어 음악인으로서의 명예나 부, 권력같은 것들은 별다른 세계의 낯선 일들일 뿐이었다.
특별히 그를 알아보거나 그의 음악을 듣겠노라고 찾아오는 청중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흑인들이 아직 ex-slave로 여겨지던 1928년 미국 남부에서, 밭에서 일하면서 틈나는 대로
흥얼거리듯 노래하고 기타로 퉁겨보듯 연주하던 그 노래들 몇 곡을 용케 모아 녹음하여 남겼을 뿐이다.

그의 말년에, 그의 음악을 듣고자 연주회장에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일로 그 자신도 깜짝 놀랐고,
그들이 불과(?) 몇 센트씩 지불한 입장료 수익은 그의 평생에 꿈꾸어보지 못한 거금이었단다.

사실 이런저런 배경을 굳이 다 모르더라도 들어보면 금방 알게 된다.
오늘날 쉽사리 찾아보기 어려운, 정말 때묻지 않은 '순수한' 음악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SJ의, 좋아하는 것을 기뻐해주는 마음과 탁월한 안목 & 발굴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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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23 15:32

Clifford Brown - a jazz musician most respected & loved by fellow musicians

From CLIFFORD BROWN JAZZ FOUNDATION


"Here are a few quotes from friends, historians and loved ones
compiled from books and liner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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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Rue Brown Watson

Liner notes, The Complete Blue Note and Pacific Jazz Recordings of Clifford Brown (Mosaic Records) 
 

"When I met Clifford, I was a music snob. I was writing my thesis in which I was trying to prove that jazz was not a form of art. Clifford and I debated the subject often. Can you believe I actually told Clifford Brown that he could not play? I even strongly recommended that he stick to ballads and the Raphael Mendez songs that he used to practice breathing and fingering. Clifford was patient with me but stuck to his belief in the music. In order to break the stalemate, I decided to take him to visit my music (classical of course) teacher. I was sure he could convince Clifford that the fast paced, dissonant racket was not music. When my teacher answered the door, he said, "Is this who I think it is?" He hugged Clifford and took him inside. I was left standing on the porch...crushed!! When I went inside, I asked my teacher if he knew of Clifford and what he thought of his playing. His answer was "This man is a musical genius! You don't understand the complexity of this music. Your music is formal, structured, this music is pure soul, free flowing." In a state of total disbelief, I started to really listen to the music. I asked Clifford questions and finally I was able to hear MUSIC. I also discovered that when Max Roach said Cliff was beautiful, he was not  referring to physical beauty. He had recognized the beauty that dwelled within and exuded from him.

 

"Another shocker happened during the time Clifford was educating me. We found that we not only respected each other and shared a valuable friendship, we were also in love.


One starlit evening we went to Santa Monica Beach. Clifford was playing with the sounds of the Pacific Ocean accompanying him. The music was lovely! The tune was one that he had just written and I was hearing for the first time. He called it "LaRue". He asked me to marry his music and him."

 

Leonard Feather

Liner notes, Memorial Album (Blue Note BST 81526)
 

"Clifford was born Oct. 30, 1930, in Wilmington, Del., he received his first trumpet from his father upon entering senior high school in 1945, and joined the school band shortly afterward. It was not until a year or so later that the mysterious world of jazz chord changes and improvisation began to shed its veil for Brownie. A talented musician and jazz enthusiast named Robert Lowery was credited by Brownie for the unveiling.

 

"The teen-aged trumpeter began playing gigs in Philadelphia after in graduating in 1948. That same year, he entered Delaware State College on a music scholarship, but there was one slight snag; the college happened to be momentarily short of a music department.

 

"Brownie remained there a year anyway, majoring in mathematics, and taking up a little spare time by playing some Philadelphia dates with such preeminent bop figures as Kenny Dorham, Max Roach, J. J. Johnson and Fats Navarro. He acquired considerable inspiration and encouragement from Navarro., who was greatly impressed by the youngster's potential.

 

"After the year at Delaware State, Brownie had a chance to enter a college that did boast a good music program, namely Maryland State. They also had a good 16-piece band, and he learned a lot about both playing and arranging. One evil evening in June 1950, when, on his way home from a gig, he was involved in the first of three automobile accidents, the last of which was to prove fatal.

 

"For a whole year in 1950-51, Clifford Brown had plenty of opportunity for contemplation, but precious little for improving his lip. It took just about a year, plus some verbal encouragement from Dizzy Gillespie, to set him back on the path from which he had been so rudely sideswiped.

 

"He had his own group in Philly for a while, then joined the Chris Powell combo, with which he was working at Cafe Society when the [6/9/53] date with Lou Donaldson was cut. There followed a stint with Tadd Dameron in Atlantic City, after which he joined Lionel Hampton, touring Europe with him until the fall of 1953. In 1954 Brownie won the Down Beat critics' poll as the new star of the year. Moving out to California, he formed an alliance with Max Roach that was to last until death broke up the team."

 

Benny Golson

Liner notes, Jams 2 (EmArcy 195 J 2), by Kiyoshi Koyama
 

"It was on the night of June 27, 1956. At that time I was playing in Dizzy Gillespie's band, and that night we were on the stage of the Apollo Theatre in New York. The first show ended and we came off the stage. After the intermission, everyone was preparing to return to the stage. Suddenly, Walter Davis, Jr. ran on stage while crying, and said to everyone, `You heard? You heard? Brownie was killed yesterday (June 26, 1956).'

 

"Of course, no musicians walking on stage could believe it. Some covered their faces with their hands and said, `Oh no!' Everyone couldn't move with shock. With tears all over, Walter said, `Clifford Brown was killed in a car accident yesterday! Pianist Richie Powell and his wife also killed!' Still I can't believe it. I felt like I almost fainted. That such a sweet guy should die in a car crash! That Richie Powell and his wife should die with him!

 

"Then the stage director shouted, `It's time, everyone! Play!' No one could do anything, although we took our seats, but of course we couldn't play. Dizzy somehow encouraged us, and the curtain was raised. Many of the musicians were crying while playing, and the music tended to be cut off from time to time. I said to myself, `This is a nightmare! It's a nightmare!' And I tried to awaken from the nightmare. But the next morning I found Brownie's death in the paper.

 

"For some time after that, all the musicians talked about was Clifford Brown."

 

Quincy Jones

Liner notes, Jams 2 (EmArcy 195 J 2), by Kiyoshi Koyama 
 

"Clifford's self-assuredness in his playing reflected the mind and soul of a blossoming young artist who would have rightfully taken his place next to Charlie Parker, Dizzy Gillespie, Miles Davis and other leaders in jazz. The record companies owe it to the future of jazz to make every possible fragment of the beautiful musical gifts Clifford gave the world with unbounded love."

 

Harold Land

Liner notes, Clifford Brown in Paris (Prestige PR 24020) 
 

"Clifford Brown was a very beautiful person. He had a very warm personality and usually seemed so relaxed it made me relaxed to be around him. In my opinion Brownie had a very even temperament, if that's the best way to describe it, and a kind of wisdom or knowledge of himself and those around him, and of life in general, that one associates with someone quite a bit older than he was at the time. And to me these same qualities were evident when he expressed himself through his instrument. I have had more than one talented musician say to me, referring to Brownie, that he played his instrument like a young old man! And in each instance I'm sure they meant this statement to be an extremely beautiful compliment, that a man so young in years could acquire such command, depth, and broad musical scope in such a relatively short span of time. Playing with the fire and creativeness of a young man, and with the depth, tenderness, and insight into past, present, and future of an older man."

 

Michael Cuscuna

Liner notes, Alternate Takes (Blue Note BST 84428)
 

"Clifford Brown was certainly a master and a major link in the history of the trumpet. This instrument has always had two kinds of stars; those who advance the mainstream evolution of the instrument and those who are of such unique proportions that they remain phenomena unto themselves with perhaps a few disciples. Miles Davis is indicative of the latter, but Brown is certainly a prime example of the former. Without Brownie, it would be hard to imagine the existence of Lee Morgan or Freddie Hubbard or Booker Little or Woody Shaw or Wynton Marsalis.

 

Donaldson (Donald) T. Byrd

Tempus Fugit, an open letter from Donald Byrd 

 

Tempus Fugit, which means in Latin, "Time Flies." This is the name of a Composition Dizzy Gillespie wrote and used to play at a ridiculous tempo.When Dizzy played this composition, I marveled at his technical ability, his magnificent range, and his distinctive tone quality. My attention was drawn to the composition: the way it was constructed, the chord progression, and the melodic lines. These were the elements that captured my attention. I gave little if any attention to the title of the tune, for the title was just two significant words written in a dead language which is still written but not spoken.

 

How many times have we heard words or phrases that have very little meaning and how many times has it taken a significant occurrence to bring about an awareness and to give meaning to a saying or phrase that you have often heard? Just such an occurrence happened to me two weeks ago in Wilmington, Delaware. All of the sudden, forty years passed through my mind at the speed of light.

 

Forty years ago (June,1956) I was shocked to hear that one of my favorite trumpeters and idols had died on the Pennsylvania Turnpike, due to bad weather and miscalculation and confusion by the driver. It brought about the demise of three persons: Clifford Brown, Richard Powell and his wife.

 

This was a great loss to the music world. Even today, his ability to perform on the trumpet is unparalleled and indelible. This I can attest to by the many requests I get to explain his approach to the art of playing trumpet. This is further seen by the popularity of his recordings, written music, and the performance of his music. All of those who have followed his lead have been impacted upon in one way or another, including me. Trumpet players such as Roy Eldridge, Charlie Chavers, Clark Terry, Harry "Sweets" Edison, Buck Clayton, Edrees Sulieman, Dizzy, Miles, Art Farmer, Nat Adderley, Benny Bailey and many others who came before him and his contemporaries were in awe of his dedication and awesome talent. Those who started out of his talent have names which run into infinity such as Bill Hardman, Lee Morgan, Freddie Hubbard, Booker Little, Woody Shaw up to and including the trumpeters of today such as Wynton Marsalis, Terrance Blanchard, Darren Barrett and many others (including Randy Brecker, Tom Harrell, Marvin Stamm, Joe Schepley). Many have written about him or quoted him musically in their performances. Clifford truly redirected the art of playing trumpet. All trumpet players from various disciplines and of different persuasions know of him and acknowledge his greatness. Clifford is immortal.

 

In Wilmington, they have named an auditorium at the Christina Culture Center in his honor. The city has further honored him by creating a Jazz Festival using his name. People from all over the world come to the festival and world class musicians perform there often dedicating compositions in his honor or playing his music. His contributions and name are timeless. His greatness can also be measured by the sales of his records, sheet music, and the honors that are still given to him. Further evidence is seen by the articles and dissertations written about him. He is held in the highest esteem by all musicians: jazz, classical and any others. As I stood before his grave, I was awestruck by his accomplishments. But as I looked at his beautiful headstone, then looked around at the cemetery where he was laid to rest, I was taken aback by the conditions of the active historical Black cemetery.

 

What had a further impact on me was the fact that he is buried with his family -- mother, father and others. Which is also near the place where the famous vibra-harpist Len Winchester is interred. Len's death is another story I will tell at a later date and time. Another point that left me speechless was at this Wilmington historical burial ground/site, there are many slave markers which have dates that are in the early 1800s, before emancipation. I had only experienced this once before, so right away I became profoundly involved. Here was my friend, idol, and one of the greatest trumpet players of this century interred beneath the garbage, rubbish, and abandoned auto parts scattered among the many pools-flooded roads, paths, and swamps of water. Here is a place surrounded by overturned headstones, desecrated grave markers, and situated only five feet from the railroad tracks. It is more to believe that Wilmington was still a segregated city in the summer of 1956, than to believe this black cemetery and others a couple of blocks down the main street were in such a condition.

 

Respect, honor and admiration do not diminish nor die at the funeral. They grow, if anything. Nothing in terms of love and devotion are lost, they are heightened, for the total picture is rarely seen.

 

My father said, "we will be judged by what we have accomplished. All of our efforts will be measured, all of our actions accounted." To sum it up it is like Max Roach's album, "Little Deeds", not words. I've never head a disparaging word spoken about Clifford Brown, only praise. Praise in terms of honor, dedications, and songs, such as Benny Golson's "I Remember Clifford."

 

How time flies is seen by the fact of all who come to the festival in his name, from all over the world. The many hundreds and thousands that go to the concert that is named in his honor, and the hundreds that pass and sit in the shadow of his bust in the Education and Humanities building at Delaware State University. They have not seen nor know the state of the burial grounds.

 

I must say to all the hundreds and thousands of young trumpet players who copy, imitate, emulate, great and not so great, young, middle aged and old, "you are next."

 

A tradition, culture, or heritage will only last--will only survive--if it is carried on and promoted. What makes a tradition and culture viable when the principles are kept alive and are used? That is what makes a culture, a society, a tradition, and heritage great! We must not only never forget but we must always remember. To use a very old expression, "how soon we forget." A phrase that is often used and sometimes looses its meaning, but then you have some events like Clifford's death and the grave site which revitalize that meaning. As I stood before his headstone and reviewed the last forty years of my life since his death, I could see how quickly time passes and in terms of his gravesite and the condition it is in, how soon we forget.

 

Too often, we have a bad habit of separating a man from his music. The music of Clifford is soul, heart, mind, and belief. As his music lives, so will his existence. Let us honor him as we honor his talent. We will always be grateful for his inspirations.

 

Sincerely,

Dr. Donaldson T. By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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