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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1 20:36

워낭이 이야기

워낭이란 이름은 내가 붙여주었다. 원래 이름은 Cow Belle 이지만 Cow Bell 처럼 읽힐 수도 있는 것에 착안하였다. 워낭이가 처음 우리집으로 오게된 즈음에 보게 된 '워낭소리'라는 다큐멘터리에 힘입은 바 크다. 나이든 소와 한 평생을 함께한 어느 농촌 노인의 삶과 우정을 잔잔하게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가 마치 나이든 워낭이와 앞으로 쌓아갈 우정을 시사해주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해준 것 같다.  




워낭이는 열살. 개의 인생으로 치면 50대 후반 중년에 해당한다고 한다. Muttvill 이라는 유기견 구호 및 입양 기관을 통해서 아내가 입양해오게 되었다. 그동안 어떤 인생(견생?) 역정을 거쳐서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는 다 알 수 없지만, 나름 쉽지않은 여정을 거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눈도 안좋고 귀에 염증도 있고 피부 앨러지와 복부 종양이 있을 뿐 아니라 척추도 약간 휘어있는 모습을 하고있기 때문이다. 찾아가는 주인이 없는 유기견의 경우 일정 기한이 지나면 죽게 되는 모양인데, 워낭이는 그렇게 예정된 바로 당일날에 구해진 경우라고 한다.

워낭이가 많은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강아지이다보니 아내는 마치 어미와 같은 심정으로 강아지를 아끼며 돌보아준다. 하지만, 아내가 워낭이에게 사랑을 흘려보내주는 일을 통해서 거꾸로 스스로 보살펴지는 듯한 효과도 있는 듯 보인다. 아내는 원래 누구를 돌보든 자신의 전부를 주곤 하던 스타일인데, 그동안 일종의 '어두운 밤' 과정을 거치면서 사역의 폭이 축소되는 동안에 충분히 흘려보지 못하고 있던 사랑을 흘려보내게 된 것이 아내의 내면을 위로하고 건강하게 하고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워낭이는 성품이 매우 좋은 강아지이다. 아직까지 이만큼 착한 강아지를 보지 못한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난 강아지 키우는 것을 그리 반기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워낭이의 팬이 되어가는 듯하다. 물론 아내가 귀하게 생각하는 존재이기에 내게도 점차로 귀해지는 면도 있을 것이다. 워낭이는 조용하고 사람을 잘 따르며, 행동은 어수룩한 데가 많아 코믹하기도 하지만 반면에 당당한 면도 함께 가지고 있다. 종류명인 '시추'라는 이름의 의미('Big hearted')처럼 넉넉하고 착한 모습에 볼 수록 매력을 느끼게 된다. 어느날 아내가 몸이 좋질 않아서 누워 쉬고있던 오후에 자기도 덩달아 기운을 잃은 듯한 모습으로 옆에 와서 함께 누워있다가 잠이 들어버린 장면을 찍어두었는데, 요즘 전화기를 킬 때마다 한번씩 보며 웃곤 한다.  
  
사람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며, 누군가를 사랑할 때 행복한 존재라는 새삼스런 사실을 리마인드 해주는 역할을 요즘 워낭이가 우리 집에서 그의 존재로써 해주고 있는 것 같다. 아내와 또 한 생명체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랑과 교감의 작용을 가만히 지켜보다 보면, 아내의 행복과 강건함과 사랑의 양육의 선기능들을 소망하고 축복하는 마음도 더 깊어진다. 이에 더하여, 더 연약하고 작은자가 실제로는 돕는자의 역할을 훌륭히 해주기도 한다는 사실, 사랑받는 자가 사랑받음을 통해 도리어 섬겨주기도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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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6 07:30

[아내의 글] 열매 맺지 못하는 시간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

아내가 사랑하는 공동체를 위해서 예전에 기고했던 글이다. 
다시 읽어보니 오히려 그때 보았던 것보다 더한 감동과 감사의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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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로다 ( 1:1-3).

 


웹진 이번 주제 Meditation(묵상) 주제 구절이 시편 1:1-3이라는 소개를 읽는데 속이 아려왔다.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고는 했지만 즐거워하지도 못했고 열매를 맺지도 못했으며 잎사귀는 커녕 나무껍질까지 벗겨진 헐벗었던 시간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비슷한 기억을 떠올리시는 분들과 공감과 격려를 나누고픈 마음에 시간을 정리해 보려한다.

 

나는 89년도 미국에 때까지 좇아온 나의 기준, 사회의 기준의 무의미함을 사무치게 경험했지만 대안을 찾지 못하고 무기력과 무관심 일색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러던 95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분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 받았고, 사랑으로 인해 사랑하며 희망을 갖게 되었다.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의 직접적인 전달자였고 나의 삶의 변화의 원동력이었으며 내가 나누어 있는 최대의 선물이었다. 자연히 말씀 묵상은 나의 매일의 축이며 등대며 잔치가 되었다.

 

그러나 2000 정도부터인지 말씀이 생명으로, 영감으로, 빛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책에 쓰여있는 선한 , 내가 이해하고 정리해서 전해야 하는 숙제일 뿐이었다. 감동이 없진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선명케 되는 문제의식과 그에 따른 결심들도 잦아졌지만, 어두운 터널에서 희미한 빛으로 발걸음이 옮겨졌다는 확신이 들기까지는 8년이 걸린 같다. 지나온 굴곡을 돌아보며, 그런 시간이 나에게 찾아 밖에 없었는지 조금은 같다.


먼저
, 때까지의 묵상을 통한 열매들이 교만의 씨가 되었다. 내가 말씀의 원리를 파악한 같았고, 원리를 벗어나 있거나 미치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 정답을 주고 싶었다. "너무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는다"는 시인의 고백과는 달리( 131:1), 스스로 제한해 놓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오히려 나 한계를 벗어나는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 안달을 부렸다.

 

또한, 묵상이 율법이 되어 버렸다. 간사에게 요청되는 하루 시간 묵상의 지침이 하나님과 이웃을 알아가는 기쁨의 수단이 아니라 미달되어서는 되는 속박의 틀이 되었다. 정해진 시간을 채우지 못하면 조급함과 짜증이 일었고, 정해진 시간을 채워도 시간 동안 내가 무엇을 했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자리에 앉아 성경책을 펴놓고 있어도, 단어 문장 적혀있는 이외에 무엇을 짜내야 하는지 깜깜했다. 예를 들어 "주님은 사랑이시다" 말씀을 읽으면, "그래, 주님은 사랑이시지. 근데 이걸 어떻게 깨닫고 설명한단 말이지?" 하는 생각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채워갔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묵상의 근원과 주체를 분명히 주셨고, 그로부터 내가 얼마나 멀어져 가고 있었는지를 지적해 주셨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하지 않습니다. 의롭다고 하여 주시는 것이 율법으로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됩니다.( 2:20-21)" 어느 말씀을 읽는 가운데, 자아의 지식과 성취욕과 강박관념에서 비롯되는 '묵상' 율법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든다는 사실에, 새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충격 이후에도 정상 궤도에 들어가기까지는 한참이 걸렸고, 기간을 다음 가지 몸부림으로 간신히 채워갈 있었다.

 

- 빳데루 -

어떤 분이 하나님께 붙어 있는 것을 "빳데루" 비교하셨다. 레슬링 시합에서 반칙을 선수가 바닥에 엎드려서 종이 때까지 견디면 다음 회를 새롭게 시작할 있게 된다는 것이다. 빳데루의 관건은, 화려한 공격도 적절한 방어도 아니고 그저 납작 엎드려 버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교만과 율법의 반칙으로 인해 어떤 방식의 묵상도 통하지 않았을 어떻게든 하나님께 붙어 있었던 것이, 다음 장을 있는 토대가 되어 주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붙어 있는 것인가" 하고 질문한다면, 내가 의식할 있는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밖에 설명할 없을 같다.

 

- 기도 -

빳데루의 표현으로, 전과는 다른 형태의 기도가 잦아졌다. 전에는 의식적으로 사람과 상황을 말씀에 비추며 부탁 드리는 의지적인 기도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성과 지각을 통한 말씀과의 교감이 막히자, 비슷한 수단을 사용한 기도도 어려워졌고, 따라서 말이나 의식상에서 표현되지 않지만 혼미하고 어지러운 마음 자체를 하나님께 드릴 밖에 없게 되었다. 기도라고 명명하기도 민망한 그런 시간을 보내며 구체적인 중보기도가 부족하다는 자책감도 들었지만, 당시로서는 바닥에 뻗어서 하나님께 붙어있게 땀방울이었다.

 

- 돌아보기 -

전까지 설정한 하나님과의 관계의 공식이 들어맞지 않게 되면서, 자신을 총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비추어 보게 되었다. 우연치 않은 여러 기회들을 통해 나의 과거, 성향, 동기들을 돌아보았으며, 나의 인생에 깊이 간섭하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을 막고 있는 매듭들을 보게 되었다. 나 자신에 대해 알게 되자, 다른 사람들을 향한 관심과 이해의 폭도 넓어지고, 사람을 섬세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초월하심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잣대에서 조금씩 자유로와지게 되었다.

 

모든 과정을 거쳐, 이제는 묵상의 운행이 정지된 듯한 터널을 지난 것이 아닌가 가늠하며 미래의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다. 그럼에도 어두운 기간의 많은 부분이 현재의 길과 여전히 얽혀서 구체적으로 어디로 이어질지 확실치 않기도 하다. 하지만, 터널의 이전보다 지금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이전에 상상했던 보다, 그리고 바랄 있던 것보다 축복의 열매였음을 분명히 고백할 있다. 오늘도 희미하게 떠오르는 말씀으로 마음과 소통하시며 세계를 붙들고 계시는 기이함이 놀라와서 다시 말씀으로 돌아갈 밖에 없다. 터널의 안도 바깥도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져 있기에, 인생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며 인도해가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사랑을 드린다.

 


주님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며, 밤도 대낮처럼 밝으니, 주님 앞에서는 어둠과 빛이 같습니다. ( 139:12)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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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6 21:30

길가에서 마주하는 생명력




바쁜 출장이었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바빴을 한 달의 시간이 마무리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른 동경에서의 주말은 여행이라기 보다는 지친 몸을 추스리는 휴양에 가까왔다. 시내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한 숙소를 오가는 길 위에 생뚱맞게 자리한 한줌의 잡초들은 그런 느린 걸음의 벗이 되어주었다. 

그들의 생명력이 고마왔다. 아름다운 꽃을 피운 것도 아니요 탐스러운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그들도 아니지만 존재 자체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제 자리를 찾지 못한 모습이 한편으로 위태로와 보이는 동시에 그 생뚱맞은 몸짓은 힘차고 유쾌해 보이기도 한다. 

그들의 존재를, 그들과의 조우를 기억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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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5 21:30

NYCP inaugural concert (10/2-3/2010)


10
주말 맨해튼의 장소에서 뉴욕 클래시컬 플레이어즈(이하 NYCP) 창립 연주회가 있었다. 음악가들이 직접 청중들에 다가간다는 취지를 바탕으로 여러 장소를 돌며 무료 공연으로 모든 연주회를 진행하는 그들의 연주 실험’이 이제 막이 오른 것이다.

NYCP
창단 동기와 관련해서 지휘자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음악을 듣기 위해 인근 공공도서관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던 어떤 노신사와 몇 번 마주치게 되었는데, 음악에 기울이는 순간 만큼은 마치 세상의 어떤 시름도 초월한 것처럼 보였던 그의 표정을 통해서 NYCP의 사명에 대한 영감을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였. 삶에 지친 이들을 음악으로 위로하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는 동기 하나되어 이제 이렇게 함께 무대에 젊은 연주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전해오는 신선한 감동이 있었다.

 

연주회를 위해 선곡된 곡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을 그들이 담아내고자 하는 생각과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해볼 있었다. 각각 개별적인 곡들의 합은 상호 유기적인 어떤 전체적인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되었는데, 요약하면, '젊은 음악''모차르트' (또는 '전통의 새로운 확장'), '음악에 대한 애정'  가지 키워드로 표현될 수 있을 것 같았. 그리고, 이는 다시 그들 스스로 정체성 및 지향점 연결되는 듯 보였다. 즉,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프로그램을 보는 그 자체로 그들의 출사표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쇼스타코비치의 “Two Pieces”(Op. 11) 제목 그대로 두 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가 평생을 흠모한 바흐의 푸가를 듣는 듯한 분위기로 시작하는 알레그로와 현대 아방가르드적 분위기의 스케르초가 재미있는 대조를 이룬. 약관 19세의 나이에 작곡가로서 인상적인 데뷰를 하게 만들었던 1 교향곡과 거의시에 작곡된 젊은 음악’으로, 곡을 통해 비로소 현대음악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몸담게 되었다고 친구에게 고백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제 자신의 음악세계를 펼쳐나가기 시작한 청년 작곡가의 기상이 녹아있는 곡을 자신들의 연주회 곡으로 선택한 NYCP 선택은 그 자체가 하나의 메세지처럼 다가왔.

 

번째 곡인 슈베르트의 바이올린을 위한 론도역시 작곡자의 나이 십대 마지막을 장식한  하나의 젊은 음악이다. 협주곡이 없는 슈베르트의 음악들 가운데서 드물게 협주곡 형태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는 듯한  분위기도 주로 멜랑콜리한 분위기가 많은 슈베르트의 작품들 가운데서는 드문 편이라고 볼 수 있다. 결코 유명세나 특별한 주목을 누리지 못하고 수줍게 숨겨져(?)있던 이런 작은 보물을 실제 연주를 통해 재발견하는 일은 즐거운 경험이다. 설득력을 가지고 빛을 발하듯 연주한 독주자의 기량이 돋보이는 연주였던 만큼 연주효과도 뛰어나서 청중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다.

 

번째 곡은 29세의 젊은 작곡가 클린트 로드햄이 NYCP 위해 작곡한 “Driving Music”이란 곡으로 이번 공연에서 초연되었다. 가장 미국적인 일상의 단면이라고 있을 장거리 운전에서의 여러가지 느낌과 무드의 반전을 음악으로 표현한 곡인데, 마치 베토벤의 대푸가처럼 여러 파트가 안에서 계속적인 진화와 진전을 이루는 형식이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의 아방가르드적인 분위기는 앞서 연주된 쇼스타코비치의 스케르초와도 연결되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런 재능있는 젊은 음악가의 음악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박수를 보내는 일은 시대를 살아가는 애호가들에게 영광스럽게 부여된 특권이자 책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해보았. 

 

마지막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였다. 이 곡과 동시에 작곡된 유명한 “1812 서곡”에 대해서는 작곡자 자신의 흥미로운 코멘트가 남아있다. 따르면,서곡 깊이도 얕고 안에 담긴 예술적인 가치도 적지만 세레나데’ 만큼은 마음 속에서 우러나온 감동으로 작품이라는 것이. 이전까지 개인적으로 익숙했던 곡의 연주 스타일은 대편성 오케스트라 버전이었는데, NYCP는 느리지 않도록 잡은 템포를 바탕으로 완급의 변화와 리듬감을 살린 소편성 해석으로 이전에 미처 알지못한 서정성과 발랄함을 맛보도록 도와주었다. 작곡자가 모차르트를 흠모하며곡을 했다고 언급한 사실을 고려하면, 그 느꼈을 감동은 어쩌면 이런 방식일 때 원형에 더 가깝게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휘자까지 합해서 14명으로 구성된 챔버 오케스트라의 장점은 오케스트라적 풍성함과 아울러 실내악적인 디테일을 함께 맛볼 수 있는 점이 아닐까 한. 공연의 장소는 상대적으로 잔향이 적은 현대적인 공간이었던 데에 반해 둘째 공연장은 공간이 크고 울림이 많은 유럽의 성당같은 곳이었다 장소에서 연주 같은 프로그램 곡들이 서로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 것은 그 자체로 흥미로왔지만, 거기에 더하여 소편성 챔버 오케스트라야말로  가지 상반된 공간적 여건에 다재다능하게 대응하기에 좋은 형태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도 흥미로운 체험이었. 잔향이 적은 곳에서는 오케스트라적 풍성함이 플러스가 되고 울림이 많은 공간에서는 반대로 실내악적 측면이 플러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양한 장소로 사람들을 찾아가게 NYCP에게 챔버 오케스트라라는 구성은 매우 적합한 형태라는 생각이 들었.

 

심리학자 융은 음악 안에 마음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음악이 영혼의 영역에 관련되어 있다고 믿는다. 음악에 담겨진 감동이 주저앉은 마음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 안에 담긴 생명력이 영혼의 터치와 치유로 이어지는 일들이 NYCP의 젊은 음악인들을 통해 이곳 저곳에서 많이 일어나게 되기를 바란다.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잔의 맑은 물'을 직접 선사하기 원하는 그들의 포부에 마음의 박수를 전한다. 나 또한 음악의 힘을 믿기에, 그런 소망들이 단순한 꿈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함께 기대도 해본. 더 나아가서, 내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순회공연도 성사되어 서부의 사람들도 찾아가는 젊은 음악’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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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7 07:15

에니어그램 컨퍼런스

이 목사님으로부터 처음 에니어그램을 배운지 2년 정도가 되었을 무렵에 첫 웍샵을 시도해본 적이 있었다. 멤버들의 성장에 꼭 필요한 좋은 도움이 될거라는 나름의 확신이 있었기에 열심히 준비해서 몇 주에 걸쳐 진행을 했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온갖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데는 성공했는지 모르겠으나, 실질적인 '영적 성장'에 도움을 주고자 한 원래의 취지에 비추었을 때에는 완전한 실패였다. 그 원인은 내용이나 진행 방식에 있었기보다는 '해석의 틀'의 부족함에 있었는데, 당시에는 이를 알지 못했다. 

이후에 좀 더 공부하고 자신에게 더 적용해보고 아내와 토론을 지속하면서, '해석의 틀'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적용에 영향이 크다는 사실에 눈뜨게 되었다. 마치 개별 성경에 대한 지식보다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관한 '신학적 틀'의 여부가 적용상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는 점과 비슷한 경우였다. 

에니어그램이 유용한 용도는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된다. 

1. 나와 다른 상대방의 성향을 이해하므로써 관계 회복이나 증진을 이루는 쪽으로 도움을 얻는 것
2. 자신에게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행동과 반응에 대한 숨겨진 동기를 발견하므로써 영적 성장의 발판을 찾는 것

여기서, 전자가 '수평적' 차이에 관한 이야기라면, 후자는 '수직적' 발전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수평적' 접근의 경우엔 이론화에 바탕을 둔 단순화가 도움이 된다. 나와 다른 상대방의 성향을 단순하게 정리할수록 쉽게 이해하는 데에 용이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수직적'인 접근의 경우 모든 발전 가능성에 대해 문을 열어놓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어떤 특정한 '유형'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역동적일 뿐만 아니라, 에니어그램 이론 또한 사람이 성장할 때 유형간의 차이가 점점 사라진다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 웍샵에서 내가 한 실수도 '영적 성장'을 위한 일에 '수평적'인 접근을 이룬 때문이었다. 그 결과는 자기 자신과 상대방을 '상자' 안에 가두는 것이 되고 말았는데, 이런 경우 에니어그램과 같은 typology는 '자유함'의 도구가 아니라 '억압'의 도구가 되어버려서 성장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하기가 쉬웠다.     

'영적 성장'을 위한 방면에 '수직적'으로 접근을 했다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이는 에니어그램의 근본적인 한계이기도 한데, 즉 '진단'은 할 수 있으되 '치료'는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숨겨진 면면들을 알고난 후에 갖게되는 "So what?"이라는 질문이야말로 이 도구에 대한 결정적인 질문이자 막다른 골목이 되고 만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를 해결할 수 없고, 오로지 절대자께 의존해서 기도하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http://www.internationalenneagram.org/conferences_calendar/index.html

이런 면들에 대해, 금년에 마침 로컬에서 있은 에니어그램 컨퍼런스는 어느 정도 확인과 위로가 되어주었다. 에니어그램의 현대적 보급의 창시자들이라 할만한 사람들이 비슷한 길로 방향 전환을 하고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두 가지의 뚜렷한 흐름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통합적'인 쪽으로 방향 전환을 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영성적' 접근으로 breakthrough의 길을 찾는 것이었다. '통합적'이라 함은 한 타입으로 나누는 데에 치중하기보다 모든 유형의 요소들을 함께 발견하여 조화시키는 접근을 의미하며, '영성적'이라 함은 수도원적 전통의 영성훈련 방법론을 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접근들에는 근본적인 한계도 있었다. 비즈니스 환경에의 적용을 용이하게 하기위한 취지의 '통합적' 접근은 그 자체로 영적성장 영역에 적용하기엔 아무래도 무리인 측면이 많았고, 그들이 말하는 '영성적'이란 말은 하나님을 제외시킨 일반적 영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임 만큼 궁극적으로 '앙꼬 빠진 찐방'처럼 어설픈 것이 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눅 16:8)고 하신 말씀이 머릿 속에 윙윙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믿지않는 저들도 어설플지언정 방향 하나는 기가막히게 잡아내는데, 나를 포함한 우리 기독교 커뮤니티는 피상성에 깊이를 더하고 막힌 곳을 돌파하는 길을 찾는 데에 왜 이리 발길이 더디고 마음은 닫혀있는지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영적 성장을 돕기위한 또 하나의 도구로서의 효용성에 관하여 시작된 생각은, 보다 큰 컨텍스트 안에서 '오늘날 왜 에니어그램이 필요하고 이런 방식의 영성훈련이 필요한가?' 하는 질문에 이르기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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